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1326년(충숙왕 13) 중랑장(中郎將)이 되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에는 대호군(大護軍)으로 전 왕인 충혜왕(忠惠王)을 복위시키기 위하여 뇌물을 가지고 원나라에 다녀왔다. 1339년(충혜왕 복위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가서 형부(刑部)에 투옥되자 함께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이 공으로 1342년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1등공신에 책록(冊錄)되고, 토지 100결(結)과 노비 10구(口) 등 많은 은전을 받았다.
1343년(충혜왕 복위 4)에는 한양군(漢陽君) 한종유(韓宗愈)와 함께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물(貢物)을 바치고 돌아왔으며,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첨의참리(僉議參理)가 되어 서연(書筵)에서 시강(侍講)하였다. 이어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왕자 왕저(王㫝: 뒤의 충정왕)를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와 즉위시킴으로써 추성선력익대정원공신 판삼사사 의창부원군(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判三司事義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왕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곧 좌정승(左政丞)에 이어 우정승(右政丞)이 되었으며, 이 해에 또다시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었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역임한 다음에, 1356년 전 호군(護軍) 임중보(林仲甫)가 충혜왕의 서자인 석기(釋器)를 추대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이에 연루되어 사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