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후기, 충혜왕 때 조적(曺頔) 등이 심왕(瀋王) 왕고(王暠)를 옹립하고자 일으킨 반란.
발단
경과 및 결과
1339년 8월 24일에 조적이 이끈 반군 1,000여 명은 충혜왕의 궁을 습격하였다. 양측은 치열하게 교전하여 충혜왕이 화살을 맞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충혜왕이 군사를 지휘해 반격해 오자 결국 반군은 패하여 달아났다. 조적은 경화공주의 처소에 숨었다가 잡혀 죽임을 당하였고 가담자들은 투옥되었다. 이어서 충혜왕은 응방(鷹坊) 홀치(忽赤) 60여 기를 평양으로 보내 심왕을 붙잡아 두게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원에서 단사관(斷事官) 두린(頭麟) 등을 파견하여 이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그는 충혜왕에게 전국인(傳國印)을 수여하는 한편, 반란에 가담했던 홍빈 등은 물론 충혜왕까지 붙잡아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로 귀환하였다. 충혜왕은 이듬해인 1340년(충혜왕 복위 1) 1월에 대도의 형부(刑部)에 투옥되어 원 조정의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곧이어 원의 실권자 백안이 세력을 잃고 지위에서 물러나자 충혜왕은 석방되어 곧 귀국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1등 공신에는 윤석(尹碩) · 채하중(蔡河中) · 이조년(李兆年)과 홍빈 등 31명이, 2등 공신에는 김승택(金承澤) · 박인수(朴仁壽) 등 18명이 이름을 올렸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 김광철, 『원간섭기 고려의 측근정치와 개혁정치』(경인문화사, 2018)
논문
- 권용철, 「대원제국 말기 정국과 고려 충혜왕의 즉위, 복위, 폐위」(『한국사학보』 56, 고려사학회, 2014)
- 김경래, 「심양왕에 대한 일고찰」(『성신사학』 6, 동선사학회, 1988)
- 김형수, 「충숙왕 후 8년(1338) 감찰사 방과 충혜왕의 복위」(『한국중세사연구』 11, 한국중세사학회, 2001)
- 김혜원, 「고려후기 심왕 연구」(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 안재민, 「충혜왕의 복위와 조적의 난」(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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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전대(前代)의 임금.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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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폐위되었던 제왕이나 후비(后妃)가 다시 그 자리에 오름.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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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중국 원나라 말기의 권신(權臣)(?~1340). 카이두(Kaidu)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무종, 인종, 영종, 태정제 아래에서 요직에 있었다. 태정제가 죽은 뒤 반대파를 누르고 무종의 장자인 명종, 아우인 문종을 차례로 즉위하게 하였다. 지나친 권세를 누린 나머지 실각하여 귀양을 가는 길에 죽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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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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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하지 못하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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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무뢰한의 무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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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사람이 기거하거나 임시로 머무는 곳.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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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정형(政刑)을 맡은 벼슬.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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