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9년(충숙왕 복위 8) 3월, 충숙왕(忠肅王)이 죽은 후 원 조정은 아직 다음 왕을 임명하지 않았다. 고려 정부의 인사들은 전왕인 충혜왕을 복위시켜 줄 것을 원 측에 요청하였지만 당시 원의 실권자였던 백안(伯顏, 바얀)은 이를 묵살하였다. 이때 개경에 있었던 충혜왕은 각종 악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8월 8일에는 급기야 충숙왕의 계비였던 몽골 출신의 경화공주(慶華公主)를 강간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경화공주는 조적(曺頔)을 불러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조적은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당시 좌승상(左丞相) 지위에 올라 있었으며, 고려의 다음 왕으로 심왕(瀋王) 왕고(王暠)를 추대하려는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다.
조적은 홍빈(洪彬) 등 정동행성(征東行省)의 관리들과 함께 충혜왕이 거처하던 궁으로 찾아가서 항의하려 하였다. 그러나 충혜왕 측근의 무뢰배들이 이들을 가로막아 들어가지 못하자, 조적 등은 경화공주의 거처인 영안궁(永安宮)을 거점으로 돌아와 세력을 규합하였다. 여기에는 홍빈(洪彬) · 신백(申伯) · 황겸(黃謙) 등 정동행성의 관료와 민후(閔珝) · 오운(吳雲) · 이안(李安) 등 고려의 관료가 포함되어 있었다. 충혜왕의 세력과 조적을 비롯하여 심왕을 옹립하려는 세력이 팽팽히 맞서는 형국이었다. 그때 개경에서는 심왕이 이미 왕이 되었다는 소문과 충혜왕의 왕위 계승이 승인되었다는 소문이 맞서며 여론전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1339년 8월 24일에 조적이 이끈 반군 1,000여 명은 충혜왕의 궁을 습격하였다. 양측은 치열하게 교전하여 충혜왕이 화살을 맞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충혜왕이 군사를 지휘해 반격해 오자 결국 반군은 패하여 달아났다. 조적은 경화공주의 처소에 숨었다가 잡혀 죽임을 당하였고 가담자들은 투옥되었다. 이어서 충혜왕은 응방(鷹坊) 홀치(忽赤) 60여 기를 평양으로 보내 심왕을 붙잡아 두게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원에서 단사관(斷事官) 두린(頭麟) 등을 파견하여 이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그는 충혜왕에게 전국인(傳國印)을 수여하는 한편, 반란에 가담했던 홍빈 등은 물론 충혜왕까지 붙잡아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로 귀환하였다. 충혜왕은 이듬해인 1340년(충혜왕 복위 1) 1월에 대도의 형부(刑部)에 투옥되어 원 조정의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곧이어 원의 실권자 백안이 세력을 잃고 지위에서 물러나자 충혜왕은 석방되어 곧 귀국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1등 공신에는 윤석(尹碩) · 채하중(蔡河中) · 이조년(李兆年)과 홍빈 등 31명이, 2등 공신에는 김승택(金承澤) · 박인수(朴仁壽) 등 18명이 이름을 올렸다.
조적의 난은 충혜왕의 악행이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하였으나, 근본적으로는 충숙왕 사후에 다음 고려 왕위를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두고 전왕인 충혜왕과 잠재적 왕위 계승 후보자였던 심왕 측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무력 분쟁에서는 충혜왕 측이 승리하였으나, 원 조정에서는 사건을 수습하면서 충혜왕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결국 이 사건은 고려 왕위를 결정하는 권한이 원 조정 측에 있었던 상황에서 비롯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