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응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 도승지, 이조판서, 의정부 좌의정 등을 지낸 문신.
이칭
응지(應之)
휴휴당(休休堂)
시호
충정(忠貞)
봉호
익성군(益城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28년(세종 10)
사망 연도
1492년(성종 23)
본관
남양(南陽)
주요 관직
의정부 좌의정
내용 요약

홍응은 조선 전기 도승지, 이조판서, 의정부 좌의정 등을 지낸 문신이다. 1451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사간원 우정언과 좌정언을 시작으로 집현전 부교리와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 대 승지로 근무하다가 1462년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예종 대 남이(南怡) 옥사에 관한 공적으로 추충정난익대공신 익성군으로 녹훈되었다.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역임하였으며, 아들이 명숙공주와 혼인하여 부원군이 되었다.

정의
조선 전기 도승지, 이조판서, 의정부 좌의정 등을 지낸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홍응(洪應)은 1428년(세종 10)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응지(應之), 호는 휴휴당(休休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홍유용(洪有龍)이다. 할아버지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추증된 홍덕보(洪德輔)이다. 아버지는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홍심(洪深)이다.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윤규(尹珪)의 딸이다. 부인은 이발생(李發生)의 딸이다. 1492년 65세에 죽었다. 아들 홍상(洪常)이 1466년 성종의 누이 명숙공주(明淑公主)와 혼례를 올려 당양위(唐陽尉)가 되었다.

주요 활동

1451년(문종 1) 문과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사간원(司諫院) 우정언(右正言)을 시작으로 좌정언(左正言)을 거쳤다. 단종 대에는 집현전(集賢殿)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 세조 즉위 후에는 집현전 교리와 좌필선(左弼善)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이후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를 거쳐 1462년(세조 8) 도승지(都承旨)에 제수되었다. 이조참판과 형조판서,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치면서 세조 재위기 동안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권람(權擥)의 추천 등으로 세조에게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계속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면서 남이(南怡)의 옥사 등에 관한 공적으로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익성군(益城君)으로 주1되었다. 이후 이조판서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오르게 되었고, 1479년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었다. 이후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조정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로 1496년(연산군 2) 신숙주(申叔舟) ·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성종의 주2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성종실록(成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예종실록(睿宗實錄)』
주석
주1

벼슬아치에게 일 년 또는 계절 단위로 나누어 주던 금품을 통틀어 이르는 말. 쌀, 보리, 명주, 베, 돈 따위이다.    우리말샘

주2

종묘와 명당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집필자
이규철(성신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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