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봉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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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은 조선 후기 규장각검서관, 안협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지는 강세황의 예술적 기질을 이어받았으며, 시에 뛰어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의 뒤를 이은 인물로 평가되었다. 특히 강진은 금강산을 세 차례나 유람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강진 (姜溍)
강진은 조선 후기 규장각검서관, 안협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지는 강세황의 예술적 기질을 이어받았으며, 시에 뛰어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의 뒤를 이은 인물로 평가되었다. 특히 강진은 금강산을 세 차례나 유람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김규진은 조선 후기 철종 때 경상도 개령에서 민란을 일으킨 주모자이다. 개령현감 김후근이 3년 동안 결세(結稅)를 과다하게 징수하자, 반민(班民)인 김규진이 개령현민들에게 통문을 돌려 백성들이 궐기할 것을 선동하였다. 이에 김규진이 붙잡혀 감옥에 수감되자, 이천 장시에 개령현민 수천 명이 모여 감옥에 갇힌 김규진과 죄수들을 석방하고, 관아에 쳐들어가 아전들을 죽이고 삼정 관련 문서와 52채나 되는 집을 붙태웠다.
김규진 (金奎鎭)
김규진은 조선 후기 철종 때 경상도 개령에서 민란을 일으킨 주모자이다. 개령현감 김후근이 3년 동안 결세(結稅)를 과다하게 징수하자, 반민(班民)인 김규진이 개령현민들에게 통문을 돌려 백성들이 궐기할 것을 선동하였다. 이에 김규진이 붙잡혀 감옥에 수감되자, 이천 장시에 개령현민 수천 명이 모여 감옥에 갇힌 김규진과 죄수들을 석방하고, 관아에 쳐들어가 아전들을 죽이고 삼정 관련 문서와 52채나 되는 집을 붙태웠다.
박시원은 조선 후기에 이조정랑, 봉화현감, 사간(司諫) 등을 지낸 문신이다. 영천(榮川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출신의 학자로서, 정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순조 때 벼슬이 사간에 이르렀다. 정조 사후에는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영천에서 경사를 깊이 탐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퇴계 이황과 자신의 선조 소고 박승임을 사표로 받들어 학문에 힘썼으며, 이산서원의 강학의 전통을 복구하였다.
박시원 (朴時源)
박시원은 조선 후기에 이조정랑, 봉화현감, 사간(司諫) 등을 지낸 문신이다. 영천(榮川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출신의 학자로서, 정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순조 때 벼슬이 사간에 이르렀다. 정조 사후에는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영천에서 경사를 깊이 탐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퇴계 이황과 자신의 선조 소고 박승임을 사표로 받들어 학문에 힘썼으며, 이산서원의 강학의 전통을 복구하였다.
송래희는 19세기 중엽 헌종과 철종 대의 유학자이며, 대사헌을 지낸 문신이다. 효종 때 산림이었던 동춘당 송준길의 후손이며, 1815년 진사 초시에 입격하였다. 1835년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된 이후, 뛰어난 학덕으로 성균관 좨주, 대사헌 등에 제수되었다. 정통 주자학적 입장을 고수하여 독서를 통해서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예의 실천을 중시하였다.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고 율곡의 이기일원론의 입장을 긍정하였다. 저서로는 『성리논변』과 『금곡선생문집』이 전한다.
송내희 (宋來熙)
송래희는 19세기 중엽 헌종과 철종 대의 유학자이며, 대사헌을 지낸 문신이다. 효종 때 산림이었던 동춘당 송준길의 후손이며, 1815년 진사 초시에 입격하였다. 1835년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된 이후, 뛰어난 학덕으로 성균관 좨주, 대사헌 등에 제수되었다. 정통 주자학적 입장을 고수하여 독서를 통해서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예의 실천을 중시하였다.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고 율곡의 이기일원론의 입장을 긍정하였다. 저서로는 『성리논변』과 『금곡선생문집』이 전한다.
이재수는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신로(新老)이다. 이정귀(李廷龜)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상 이천보(李天輔)이다. 아버지는 판서 이문원(李文源)이며, 어머니는 심숙(沈鏽)의 딸이다. 1809년(순조 9)에 문과 별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1813년 황해도 지역의 암행어사, 1813년 제주 찰리사로 파견되어 수령의 잘잘못을 가리고, 삼정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경상도관찰사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1822년에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이재수 (李在秀)
이재수는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신로(新老)이다. 이정귀(李廷龜)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상 이천보(李天輔)이다. 아버지는 판서 이문원(李文源)이며, 어머니는 심숙(沈鏽)의 딸이다. 1809년(순조 9)에 문과 별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1813년 황해도 지역의 암행어사, 1813년 제주 찰리사로 파견되어 수령의 잘잘못을 가리고, 삼정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경상도관찰사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1822년에 임지에서 사망하였다.
이채(李采)는 조선 후기에 상주목사, 황주목사, 경주부윤, 승지 등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華泉)이며,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손자이다. 이재는 여흥민씨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의 조카로서, 노론의 핵심 집안으로 분류된다. 이채는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1780년까지 호조정랑, 돈녕부 주부, 음죽현감으로 활동하였으나, 1780년 이후로는 주로 향리에 머물며 학문 연구에 주력하면서 조부 이재의 문집인 『도암집(陶菴集)』을 편찬하고 간행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채 (李采)
이채(李采)는 조선 후기에 상주목사, 황주목사, 경주부윤, 승지 등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華泉)이며,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손자이다. 이재는 여흥민씨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의 조카로서, 노론의 핵심 집안으로 분류된다. 이채는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1780년까지 호조정랑, 돈녕부 주부, 음죽현감으로 활동하였으나, 1780년 이후로는 주로 향리에 머물며 학문 연구에 주력하면서 조부 이재의 문집인 『도암집(陶菴集)』을 편찬하고 간행하는 데 힘을 쏟았다.
조석여는 조선 후기에 예문관제학, 황해도관찰사, 이조판서, 사헌부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소론 출신 집안에서 태어나 1846년(헌종 12)에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848년(헌종 14)에 참봉으로서 문과 별시에 급제하였다. 1850년(철종 1) 경상도암행어사를 거쳐 1866년(고종 3)에 강원도관찰사, 1869년에 황해도관찰사, 1876년(고종 13)에 형조판서, 1879년(고종 16)에 의정부 우참찬, 1883년(고종 20)에 홍문관제학, 사헌부 대사헌,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조석여 (曺錫輿)
조석여는 조선 후기에 예문관제학, 황해도관찰사, 이조판서, 사헌부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소론 출신 집안에서 태어나 1846년(헌종 12)에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848년(헌종 14)에 참봉으로서 문과 별시에 급제하였다. 1850년(철종 1) 경상도암행어사를 거쳐 1866년(고종 3)에 강원도관찰사, 1869년에 황해도관찰사, 1876년(고종 13)에 형조판서, 1879년(고종 16)에 의정부 우참찬, 1883년(고종 20)에 홍문관제학, 사헌부 대사헌,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