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양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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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천도는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충청남도 공주)으로 도읍지를 옮긴 사건이다. 475년 9월 장수왕이 이끄는 3만의 고구려군은 한성을 불시에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한 후 주민 8천 명을 포로로 잡고 곧바로 철수했다. 왕자 문주가 동맹국 신라의 구원병 1만 명을 이끌고 도착했으나 한성은 이미 폐허가 된 상태였다. 문주는 폐허에서 왕위에 오른 후 그해 10월 웅진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천도를 단행했다. 백제 역사상 정치·경제·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추동한 사건이다. 천도 후 100여 년이 지나 무령왕이 집권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웅진천도 (熊津遷都)
웅진천도는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충청남도 공주)으로 도읍지를 옮긴 사건이다. 475년 9월 장수왕이 이끄는 3만의 고구려군은 한성을 불시에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한 후 주민 8천 명을 포로로 잡고 곧바로 철수했다. 왕자 문주가 동맹국 신라의 구원병 1만 명을 이끌고 도착했으나 한성은 이미 폐허가 된 상태였다. 문주는 폐허에서 왕위에 오른 후 그해 10월 웅진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천도를 단행했다. 백제 역사상 정치·경제·문화적으로 큰 변화를 추동한 사건이다. 천도 후 100여 년이 지나 무령왕이 집권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사비천도는 538년(성왕 16) 백제 성왕이 도읍지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사건이다. 사비는 현재 충남 부여로, 방어에 유리하지만 협소한 웅진에 비해 넓은 평야지대와 금강을 통한 해상교통로를 갖추고 있어 동성왕대부터 관심을 가진 곳이었다. 천도를 실현한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목적으로 부소산성, 왕성 등을 축조하고 체제정비와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성왕은 70년 만에 한성을 회복하기도 하였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며 중흥을 실현하지 못했다. 사비천도는 성왕이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체제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백제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사비천도 (泗沘遷都)
사비천도는 538년(성왕 16) 백제 성왕이 도읍지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사건이다. 사비는 현재 충남 부여로, 방어에 유리하지만 협소한 웅진에 비해 넓은 평야지대와 금강을 통한 해상교통로를 갖추고 있어 동성왕대부터 관심을 가진 곳이었다. 천도를 실현한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목적으로 부소산성, 왕성 등을 축조하고 체제정비와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성왕은 70년 만에 한성을 회복하기도 하였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며 중흥을 실현하지 못했다. 사비천도는 성왕이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체제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백제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달구벌 천도 계획은 689년 신라의 신문왕이 도읍지를 현재의 대구광역시인 달구벌로 옮기려 했던 계획이다. 신문왕은 경주 지역의 진골귀족세력을 벗어나 새 수도 건설을 통해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천도를 추진하였다. 달구벌이 후보지가 된 것은 팔공산 등 큰 산이 있어 방어에 유리하고 교통이 편리한 지리적 요건과 농경지대에다가 낙동강을 통한 물자수송이 편리하다는 경제적 측면 외에도 경주와 가깝고 왕실세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계획은 9주 5소경의 정비 이후 결정, 준비가 진행되다가 막대한 비용 부담과 진골귀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었다.
달구벌 천도 계획 (達句伐 遷都 計劃)
달구벌 천도 계획은 689년 신라의 신문왕이 도읍지를 현재의 대구광역시인 달구벌로 옮기려 했던 계획이다. 신문왕은 경주 지역의 진골귀족세력을 벗어나 새 수도 건설을 통해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천도를 추진하였다. 달구벌이 후보지가 된 것은 팔공산 등 큰 산이 있어 방어에 유리하고 교통이 편리한 지리적 요건과 농경지대에다가 낙동강을 통한 물자수송이 편리하다는 경제적 측면 외에도 경주와 가깝고 왕실세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계획은 9주 5소경의 정비 이후 결정, 준비가 진행되다가 막대한 비용 부담과 진골귀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었다.
와박사는 백제에서 기와를 만드는 전문기술자에게 수여했던 관직이다. 백제는 4세기 후반에 유학에 조예가 깊은 고흥이나 왕인 등을 오경박사나 태학박사에 중용하였다. 6세기 초반에 이르러 박사제도가 확대되어 역박사·의박사·와박사·노반박사 등 다양한 직능의 박사가 나타났다. 와박사는 도공이나 와공을 총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연꽃무늬의 반전 수법 등 와당 제작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백제의 독자적인 와당 양식은 신라와 일본에 전파되었다. 특히 야마토정권의 요청에 따라 파견된 와박사는 와당 제조 기술을 일본에 전파함으로써 동아시아 문화의 교류와 활성화에 이바지하였다.
와박사 (瓦博士)
와박사는 백제에서 기와를 만드는 전문기술자에게 수여했던 관직이다. 백제는 4세기 후반에 유학에 조예가 깊은 고흥이나 왕인 등을 오경박사나 태학박사에 중용하였다. 6세기 초반에 이르러 박사제도가 확대되어 역박사·의박사·와박사·노반박사 등 다양한 직능의 박사가 나타났다. 와박사는 도공이나 와공을 총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연꽃무늬의 반전 수법 등 와당 제작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백제의 독자적인 와당 양식은 신라와 일본에 전파되었다. 특히 야마토정권의 요청에 따라 파견된 와박사는 와당 제조 기술을 일본에 전파함으로써 동아시아 문화의 교류와 활성화에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