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강세환(姜世煥). 자는 중순(仲順), 호는 해은(海隱) 또는 법은(法隱). 봉화 법전(法田) 출신. 아버지는 강식(姜植)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이중연(李重延)의 딸이다. 소론(少論)의 영수인 윤증(尹拯)의 제자 강찬(姜酇)의 후손으로 윤광소(尹光紹)를 스승으로 섬겼다.
1800년(정조 24) 집 동쪽에 중국 창주(滄洲)에 있는 주희(朱熹)의 경의재(敬義齋)를 모방하여 서실(書室)을 짓고, 주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성혼(成渾)의 「우계서실의(牛溪書室儀)」를 써서 걸고, 윤증의 획일도(畵一圖)를 준칙(準則)으로 삼았는데, 사방에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803년(순조 3)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순릉참봉(順陵參奉), 1814년(순조 14)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842년(헌종 8)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에 임명되었다가 곧 충청도도사로 옮겼으며, 이듬 해 통정대부에 승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여러 성리서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천명(天命)은 이(理)로 말하는 경우도 있고, 기(氣)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고 논하였다. 또한,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에 있어서 이선기후(理先氣後) · 기선이후(氣先理後)가 모두 가능하며, 이기는 서로 체용(體用)이 된다는 이기론을 전개하였다.
저술로는 『고성현고경록(古聖賢考經錄)』 · 『근사속록(近思續錄)』 · 『소계회화록(素溪會話錄)』 · 『석척록(夕惕錄)』 · 『사유록(四遊錄)』 · 『경서고이(經書考異)』 등이 있으며, 문집인 『해은유고(海隱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