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2월 1일부터 1980년 8월 9일까지 『동아일보』, 1980년 9월 11일부터 『조선일보』 사회면에 연재되다가 1992년 10월부터 『문화일보』에 게재되었다. 원래 「고바우영감」은 1950년 『만화신문』과 『만화승리』 등 기관지와 『월간희망』에 실리다가 『동아일보』에서 확고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광복 후 『동아일보』의 첫 연재만화로 등장한 초창기 「고바우영감」은 직사각형의 긴 얼굴에 각이 진 코, 작은 안경과 콧수염, 항상 작은 중절모를 쓴 40, 50대 전후의 인물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 뒤 얼굴의 형태가 훨씬 둥글고 부드러운 모습에 모자 없이 한가닥의 머리카락이 곧추선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세번째로 변화된 현재의 모습은 뭉툭하고 큰 코에 어울리지 않는 콩알만한 작은 안경, 보일듯말듯한 채플린형의 콧수염을 기르고, 입은 아예 생략된 얼굴 모습을 가지고 있다. 희로애락의 감정은 편편한 머리 위에 안테나처럼 ㄱ자형으로 한 올 남아 있는 머리카락으로 표출되며, 좀 딱딱하고 강직한 인상의 외형에 고집스럽고 고지식한 성격의 50대 중반으로 표현하였다.
연재 초기 주로 가정적이고 넌센스적인 팬터마임형식의 가벼운 세태풍자물이었으나, 각 분야가 다양하고 복잡하게 변화함에 따라 불합리한 모순을 지적해서 직접·간접으로 비판하고 풍자하는 짙은 시사성 위주의 만화로 성격이 바뀌었다.
특히, 정치와 정부정책 등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민의의 대변자 구실을 하여 독자들로부터는 환영과 찬사를 받았으나, 당국의 눈총을 받아 여러 차례의 필화사건을 겪기도 하였다.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는 자유당정권 때인 1958년 1월 23일자에 게재된 세칭 ‘경무대청소부사건’이다. 경무대 청소부를 소재로, 그 당시 사회의 지탄대상이 된 권력만능의 세태를 풍자해서 그린 만화내용이, 경무대를 모욕하고 허위사실을 게재하였다는 이유로 경찰당국에 입건되어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이 사건으로 작가는 경범죄로 판결되어 벌금을 물었는데, 이 사건은 광복 후 한국신문사상 신문만화가가 법의 심판을 받은 최초의 필화사건이다.
「고바우영감」은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일본을 비롯한 해외 여러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져, 그들의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되기도 하고 특집으로 꾸며지기도 하였으며,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1958년에는 영화로 제작되어 상영되기도 하였으며, 유행가로 만들어져 불리기도 하였다. 게재 초기에는 문화면에 실리다가 1963년 2월 8일부터 사회면으로 옮겨서 게재되었다.
1963년 4월 10일부터 작가의 병고로 잠시 휴재되었다가 1964년 1월 1일부터 다시 계속되었으며, 1980년 8월 9일까지 7,971회라는 대연재기록을 세우고 중단되었다가, 그 해 9월 11일부터 『조선일보』 사회면에 연재되어 1987년 5월 9일 1만 회를 돌파하였다. 1992년 10월부터 『문화일보』에 연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