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덕왕 때 월명사(月明師)가 지은 10구체 향가. ≪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7 ‘월명사 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에 실려 있다.
기록에 따르면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비는 노래로, 작가가 재(齋)를 올리며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홀연히 바람이 불어 지전(紙錢)을 날려 서쪽(서방 극락세계 방향)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 지전은 죽은 자에게 주는 노자(路資)로 지금도 장송(葬送) 때 볼 수 있는 것으로 꼭 불교 의식에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죽은 뒤의 세계라고 하여 현세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의식이다.
이 노래의 원가사와 현대어 풀이는 다음과 같다.
① 원문
生死路隱 此矣 有阿米 次肸伊遣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枝良出古 去奴隱處毛冬乎丁
阿也 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② 현대어 풀이
죽고 사는 길 예 있으매 저히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다이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아으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리다.(양주동 풀이)
이 노래는 죽음에 부닥쳐서 죽은 자의, 그것도 골육인 누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다. 그 명복은 막연한 것이 아니고, 월명이 승려이기 때문에 사후의 세계를 불교적으로 관상한 것으로, 서방극락정토, 무량수(無量壽)를 누릴 수 있는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의 세계로 가기를 빈다.
즉, 그곳만이 가야 할 사후의 세계이고, 현세의 삶이란 그곳에 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막상 죽음에 다다랐을 때, 그것도 골육과의 사별에 임했을 때, 월명은 죽음의 현장성(現場性)을 느낀다.
인간세상이란 죽음과 삶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혼융(混融)되어 있는 것으로, 살아 있는 월명이 죽어가는 누이를 보는 것이다. 그 때 살아 있는 자신의 죽음을 누이를 통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과 같이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하여, 죽음에 대한 서정을 비유로써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죽음을 절감한다.
그러한 형상화는 누이의 죽음으로 더 한층 짙게 인식된다. ‘어느’란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있는 시간으로, 시시로 닥쳐 오는 죽음을 인식하게 해 준다.
죽음 앞에 서 있는 동류의식(同類意識)의 표현인 ‘한가지에 나고’는 현상적으로 인식되지만, 죽음에서는 그것은 미지이다(가는 곳 모르누나). 이것은 불교의 윤회사상에 바탕을 둔 무상인간의 변하여 달라짐을 말하는 것 같으나, 오히려 원고적(原古的)인 사후의 관념이다. 그래서 가는 곳을 비유하여 ‘이에 저에’라 표현하였다.
육도환생(六道還生)이라는 교훈적인 종교의 내세관에서보다는 삶 자체가 하나의 나뭇잎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생의 허무감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허무감은 결국 종교적으로 귀의하게 한다. 그래서 “미타찰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리다.”하여 인생의 허무감을 아미타불에 귀의함으로써 종교적으로 승화시킨다.
무량수를 누릴 수 있는 미타찰, 서방극락정토에는 인간 누구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가서 누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도를 닦으며 기다려야 한다.
즉, 누이는 이미 그곳에 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원으로, 기원하는 바를 이루어진 결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초월적인 대상에게 기원하는 의식 노래로서의 특성이 나타나 있다.
한편, 이 작품은 제전이라는 의식적 배경을 도외시한다면 순수한 서정시의 자질을 갖게 된다. 죽음과 삶이 혼융된 인간세계에서 죽음과 삶의 갈등을 항상 겪어야만 하는 인간, 그가 느끼고 있는 삶에 대한 허무감 등은 인간이 넘지 못할 하나의 불가피한 상황으로, 이것의 인식과 생각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 노래는 재의식(齋儀式)에서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며, 나아가 극락왕생을 천도한 노래로 일종의 축(祝)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식적 형태에만 얽매이지 않고, 누이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죽음에 대한 인식과 그것에서 느끼는 정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경건한 분위기로 표현한 개성적인 서정시이기도 하다.
적절한 시어의 선택과 표현법으로 죽음에 대한 서정을 담고 있다. 집단 감정의 표현이나 어떤 목적의식에 의한 공리적인 노래가 아닌, 순수한 서정시로서의 지평을 열어 주는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