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소을비포 성지 ( )

고성 소을비포성지
고성 소을비포성지
건축
유적
문화재
조선시대, 성종22년(1491)에 초축된 후 조선 후기까지 수차례 수 · 개축이 이루어진 남해안 지역 영진 보성. 경상남도 시도 기념물.
이칭
이칭
소비포 , 솔비포
유적
건립 시기
1491년(성종 22년)
관련 국가
조선|일본
높이
4m
둘레
330m
면적
16,999㎡
소재지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 398-4 외 9필지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경상남도
종목
경상남도 시도기념물(1994년 7월 4일 지정)
소재지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 398-3 외 14필지
내용 요약

고성 소을비포 성지는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에 소재하는 남해안 지역 영진 보성으로, 1491년(성종 22년)에 초축된 후 조선 후기까지 수차례 수·개축이 이루어졌다. 이 성은 해안의 서쪽으로 뻗은 구릉 9부 능선상에 석축으로 축조되었다. 성지의 평면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으며, 동쪽에는 남쪽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북쪽 벽과 남쪽 벽 일부가 훼손되었다. 성의 둘레는 330m이며, 잔존 최고 높이는 4m이다. 동·서·북문이 배치되어 있고 해자(황)와 치성이 확인된다. 고지도에는 여장이 표시되어 있다.

정의
조선시대, 성종22년(1491)에 초축된 후 조선 후기까지 수차례 수 · 개축이 이루어진 남해안 지역 영진 보성. 경상남도 시도 기념물.
건립 경위

이 성지는 1491년(성종 22)에 축조된 성곽으로 『조선왕조실록』 · 『난중일기(亂中日記)』 · 주6 · 『대동지지(大東地志)』 · 『철성지(鐵城誌)』 등의 문헌에는 남해안 왜구 방비를 목적으로 조선시대에 진보를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변천

『대동지지』 「고성진보조(固城鎭堡條)」에 “구소을비보 서사십칠리 초치권관 성종이십이년 축성 주팔백이십오척 선조삼시칠년 이우거제지수영지(舊所乙非堡 西四十七里 初置權管 成宗二十二年 築城 周八百二十五尺 宣祖三十七年 移于巨濟之水營址)."로 기록되어 있다.

형태와 특징

현존하는 성벽 몸체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으며, 북쪽 성벽 몸체는 9부 능선상에 축조되었다. 북문지는 성벽 몸체 동쪽으로 치우쳐서 조성되어 있고, 이곳은 주7에서 일부 높이까지는 내탁하는 수법으로 석축이 배치되었다. 생토층을 평평하게 다듬어서 비교적 납작한 냇돌로 가지런히 깔아 지대석을 삼고 지형이 낮은 곳은 지대석을 2~3단 정도 깔아서 북쪽 벽 전체 지대석 상면이 수평하도록 조치하고 그 위에 자연 대석의 주8을 올려놓았다. 이때 기단석은 지대석에 수직하게 세우고 그 뒷편에는 소형 주3으로 채워 주4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기단석과 그 아래 지대석은 직선상에 위치한다. 동쪽 성벽 몸체는 경사진 지형을 따라 계단상을 이루고 축조되었다. 생토층면을 니은(ㄴ) 모양으로 삭토하고 그 위로 10cm 내외의 주9을 깔았다.

외벽 쪽은 부석 상부에 외벽에서 내벽 쪽으로 4m 정도까지 두께 20~30cm 내외의 주10을 깔아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로 기단석을 올려 쌓은 형태이다. 성벽은 부석 위로 천석을 적심석으로 채워 넣은 상태로 내벽은 적심석이 성벽 진행 방향으로 열을 맞추어 있으며 외벽 쪽으로 계단상을 이루고 있다. 이곳 성벽 몸체는 바닷물로 인한 성벽의 유실을 막기 위해 기단부에서 150cm 정도 바깥으로부터 계단상의 지대석 보강 시설을 설치하고 그 내부는 할석을 채웠으며 그 위에 두께 20cm 정도 되는 판상의 지대석을 세워 놓았다. 그 위의 성석은 판상의 주11을 이용하여 눕혀쌓기와 주12를 교대로 하고 있다. 하부 지대석으로부터 높이는 4m이고, 기단석으로부터 높이는 3.5m이다.

동 · 서 · 북문이 있으며, 그중 북문지는 성벽 몸체를 절개하여 개구시킨 형태로서 처음에는 내부에 정면 3칸, 옆면 1칸의 주13를 조성한 뒤에 3~4차에 걸쳐 개수하였다. 초축 문루는 정면 755cm×측면 470cm 가량이며, 문지 하부에 직경 5~7cm, 간격은 7~15cm 정도로 소형 주1 49개가 확인되었다. 주5은 3개소가 확인된다. 잔존 치성은 3.2×1.3m, 6×4.2m, 7.2×5.3m로 동시 축조되었다. 해자는 자연 암반층을 굴토하여 단면 유(U) 모양을 띠고 있으며, 깊이 2m, 너비 6.4m이다. 해자 기능이 상실되면서 의도적으로 내부를 일시에 메웠다.

건물지는 8동이 확인되고 있으며 병영 및 군사 관련 중심 건물과 숙소 건물로 추정된다. 각 건물지는 위계에 따라 위치를 달리하였다. 또한 북문지 서쪽에 제련과 관련된 폐기장 20여 기 이상이 확인되었다. 공방지는 북문지 남서쪽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출토 유물은 백자편, 옹기편, 기와편 등이 수습되었다. 이 중 기와는 문양이 희미한 무문양이나 창해파문이 얕게 타날된 소파편과 선조문, 주14, 주15 및 복합문 기와가 확인된다. 자기는 15세기에 유행한 분청사기류에서 20세기 초까지 통용된 경질 백자가 확인된다. 이외에도 각종 동전류가 출토되었다.

발굴 경위 및 결과

1998년 동아대학교 박물관과 2005년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성벽 몸체, 북문, 동문, 성내 건물지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다. 성벽 몸체와 성문 주2가 복원되었다.

의의 및 평가

소을비포 성지는 고고학적 발굴 조사와 문헌 기록으로 살펴볼 때 1491년(성종 22)에 초축되어 수군 만호진과 경상 우수영이 설치되었던 성곽으로, 1756년(영조 32) 사이에 수차례 수 · 개축되었다. 특히 고고학적 조사 결과 확인된 건물지 및 공방지 등의 유구와 출토된 유물 양상으로 볼 때 조선시대 남해안 지역 수군 영진 보성의 규모, 축조 수법, 운용 상황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東亞大學校博物館, 『固城所乙非浦城址』(文化遺蹟發掘調査報告書, 1999)
東亞細亞文化財硏究院, 『(문화유산발굴조사보고서)고성 소을비포성지』 17(2007)
이일갑, 『조선의 영진보성』(국학자료원, 2022)
주석
주1

가늘게 다듬어 깎아서 무슨 표가 되도록 박는 나무 말뚝. 우리말샘

주2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우리말샘

주3

구조물의 기초에 쓰이는 깬돌. 1개의 중량이 10~100kg로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말샘

주4

돌 따위를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 우리말샘

주5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6

조선 성종의 명(命)에 따라 노사신 등이 편찬한 우리나라의 지리서.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여 우리나라 각 도(道)의 지리ㆍ풍속과 그 밖의 사항을 기록하였다. 특히 누정(樓亭), 불우(佛宇), 고적(古跡), 제영(題詠) 따위의 조(條)에는 역대 명가(名家)의 시와 기문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55권 25책의 활자본. 우리말샘

주7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 우리말샘

주8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로 쌓는 돌. 우리말샘

주9

집터 또는 무덤의 바닥이나 둘레에 한두 겹 얇게 깐 돌. 우리말샘

주10

판자 모양으로 가공되어 바닥이나 벽면에 붙이는 석재. 암석 가운데 15~38cm의 납작하고 편평한 암석을 말한다. 지붕, 바닥, 벽면이나 도로 따위에 이용된다. 우리말샘

주11

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어 만든 돌. 우리말샘

주12

벽돌을 길이로 세워 쌓는 방법. 우리말샘

주13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우리말샘

주14

꽃 모양의 무늬. 우리말샘

주15

대각선이 대칭을 이루며 연속되어 만들어진 무늬.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이일갑(시공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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