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읍성 ()

기장읍성의 성벽
기장읍성의 성벽
건축
유적
문화재
조선 전기, 부산광역시 기장군 지역에 만들어진 석축 읍성. 부산광역시 시도기념물.
이칭
이칭
기장현성, 기장군성, 기장성
유적
건립 시기
조선시대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최윤덕, 정분
높이
약 4m
둘레
약 969m
면적
12,003㎡
소재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부산광역시
종목
부산광역시 시도기념물(1996년 05월25일 지정)
소재지
부산광역시 기장군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원
내용 요약

기장읍성(機張邑城)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의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에 걸쳐 있는 조선 전기의 석축 읍성이다. 현재 둘레 약 1000m, 높이 최고 약 4m 정도의 돌로 된 성벽이 남아 있으며, 성문 2개소, 치성 2개소, 서벽과 남벽을 둘러싼 해자가 확인된다. 주형의 평산성으로 북쪽은 낮은 동산을 끼고 있고 남쪽은 평지이다. 성내 동헌 및 객사지 등이 일부 확인되었고 장관청은 복원되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이다.

정의
조선 전기, 부산광역시 기장군 지역에 만들어진 석축 읍성. 부산광역시 시도기념물.
발굴 경위 및 결과

2006년부터 2012년 사이에 기장읍성(機張邑城)의 북벽과 동벽 일부, 적을 방어하고 공격할 수 있는 옹성, 주1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기장읍성은 경사면에 지대석과 기단석을 그대로 쌓는 '사직선기단(斜直線基壇) 축조 방식'을 사용한 것이 밝혀졌다. 또한 성벽의 몸체(體城壁)에 가늘고 긴 직사각형 모양의 면석을 사용한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건축 방식은 고려시대의 성곽 축조 수법과 조선시대 연해읍성(沿海邑城)의 축조 수법을 혼용한 것이다. 2012년 객사와 동헌 및 북문지와 동문지 사이의 성벽에 대한 조사가 추가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복원된 장관청과 성내 관아 건물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도 이루어졌다. 2017년에서 2021년 사이에는 남문의 옹성, 남벽과 서벽의 체성, 남동 성우, 남벽과 서벽의 해자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하여 읍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하였다.

건립 경위

세종 3년(1421)에 기장군 지역에 성을 쌓기로 하였으며, 세종 7년(1425)에 성이 세워졌다. 문종 원년 당시 기장읍성의 규모는 적대가 6개, 옹성이 돌려진 성문이 3개소, 주3이 383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읍성을 돌로 쌓았는데 그 둘레가 350보이며, 성 안에 못과 우물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기장군 읍지를 비롯한 각종 읍지에는 성의 둘레가 3,197척(약 939m)이고 높이가 12척(약 4m)인 석축 읍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형태와 특징

성벽의 몸체는 사직선 기단과 수평 기단을 혼용해 만들었다. 외벽은 주4으로 세워쌓기와 눕혀쌓기를 교대로 했다. 동문지와 그 주변 그리고 서벽의 체성은 비교적 좋은 상태로 남아 있다. 동문지의 옹성은 반원형의 편문식으로 성벽에 덧대어 만들었다. 옹성 내벽의 직경은 약 14m, 둘레 약 23.5m, 높이는 2.3~0.3m이다. 남아 있는외벽의 둘레는 약 50m, 폭은 6.5~7m이다. 적대는 동문지에서부터 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서 확인된다. 북측 벽에 이어진 적대의 일부분은 복원되어 있다. 적대의 규모는 길이 8.9m, 너비 7.3m이다. 해자는 남벽과 서벽, 남동벽으로부터 9∼12.6m, 7.8∼10m, 8m의 이격 거리가 확인되며, 남벽 해자의 너비는 5.5~6m 내외, 남아 있는 해자의 깊이는 0.6~1.5m 내외로 확인된다.

읍성 내의 관아 건물로는 주5 · 기장 향교(향사당) · 객사 · 주10 · 인리청 · 군성관 · 면금루 · 척서루 · 식파루 · 주7 · 주8 · 군기고 등이 있었으며, 성문 밖에는 망풍정 · 공신루 · 관덕정 · 주9 · 마지 등이 있었다고 한다.

변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죽성리 왜성(기장 죽성리성)을 쌓으면서 기장읍성의 돌을 반 이상 뽑아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에 기장읍성의 성벽이 상당 부분 무너졌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8·15광복 이후 성의 내부에 학교와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성벽은 더욱 심하게 훼손되었다. 다만 일부 양호한 구간이 있고 민가의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성의 외부에도 곳곳에 택지가 조성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기장읍성은 조선시대 읍성의 축조 기법이 정립되기 전에 만들어진 성이다. 그래서 이 읍성은 고려시대 성곽 축조 수법과 조선시대 읍성 축조 수법이 혼합되어 있다. 읍성 축조 수법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장읍성은 읍성 축조사에서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재)시공문화재연구원, 『부산 기장읍성 해자 유적』(2022)
(재)울산문화재연구원, 『기장읍성 남서쪽외곽』(2020)

논문

이일갑, 「조선전기 기장읍성의 축조기법에 대한 소고」(『한국성곽학보』 19, 2011)
주석
주1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臺). 우리말샘

주3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4

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어 만든 돌. 우리말샘

주5

지방 관아에서 고을 원(員)이나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사(水使) 및 그 밖의 수령(守令)들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 우리말샘

주7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는 건물. 조선 후기 동래부 군 장관들의 집무소로 사용한 건물로, 현종 10년(1669)에 동래 부사 정석(鄭晳)이 창건하여 숙종 32년(1706)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로, 유형 문화재 정식 명칭은 ‘동래 장관청(東萊將官廳)’이다. 우리말샘

주8

조선 시대에, 영리(營吏)가 사무를 보던 곳. 우리말샘

주9

조선 시대에, 감영ㆍ병영ㆍ수영 따위에 설치한 창고. 군량미와 병장기 따위를 보관하였다. 우리말샘

주10

조선 시대에, 각 고을의 환곡(還穀)을 저장하여 두던 곳집. 문종 원년(1451)에 설치하여 점차 확대하였으나, 환곡의 문란으로 순조 5년(1805)에 호남ㆍ호서 지방은 관찰사 재량으로 그 존폐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5)
집필자
이일갑(시공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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