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국미(國美), 호는 성재(省齋).
1687년(숙종 13) 역과(譯科)에 급제하여 역관이 되었다. 여러 차례 청나라에 다녀와서 외교관으로서의 실력을 발휘하여, 그 공으로 2품의 관계에 올랐다. 1734년 다시 청나라에 가다가 도중에 병사하였다.
경전과 백가(百家)에 능하여 사역원의 후배들이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물었다. 특히, 한시에 뛰어나 당대의 평민시인인 임원준(林元俊) · 홍세태(洪世泰) · 정내교(鄭來僑) 등과 함께 당풍(唐風)을 본받은 4대시인으로 일컬어졌다. 일반적으로 사리(辭理)가 정연한 시를 짓는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대제학 남유용(南有容)도 그의 문장을 칭찬하였다.
만년에는 세조 때부터 영조 때까지의 서민시(庶民詩)를 수집하여 『소대풍요(昭代風謠)』를 편찬하여 조선시대의 중요한 시문학 자료가 되게 하였다. 저서로는 『성재집(省齋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