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4.81m, 불상 높이 3.98m, 대좌 높이 0.83m. 광덕사 법원 앞에 동향하여 서 있는 이 거구의 입불(立佛)은 지금 봉안되어 있는 건물로 옮겨지기 전에도 인근 주민들에 의해 일찍부터 신앙되어 왔다고 한다.
이곳은 미륵 부처님이 계신 곳이라 하여 속칭 ‘미륵댕이절(彌勒堂)’ 혹은 ‘천광사(天光寺)’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이곳 광덕사가 위치하고 있는 야산 기슭은 석불 이외에 파손된 탑 부재(塔部材)가 눈에 띄고 주위 농경지에도 와편(瓦片)이 산재해 있어 옛 폐사지(廢寺址)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고려시대에 창건되고 조선시대에 중창하였다는 이야기만 전하고 있을 뿐 그 정확한 내용은 남아 있지 않다. 사찰측에 따르면 1949년 석불의 현몽(顯夢)을 얻었다는 이묘련(李妙蓮)이 거불 옆에 초암(草庵) 3칸을 세우고 조석 공양(朝夕供養)을 올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광덕리의 광덕을 따서 사명(寺名)을 광덕사라 하였다고 한다. 불상은 대형의 원형 연화대좌(蓮華臺座)를 밟고 서 있는데 5m에 가까운 육중한 거구가 위압적이다. 존상(尊像)은 전면이 미세하게 앞으로 기운 감이 있지만 균형 잡힌 각부의 표현에서 전체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여 준다.
살찐 직사각형의 얼굴은 체구에 비해 큰 편이다. 알맞게 부풀어 오른 양 볼에서 부드러운 양감이 느껴진다.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큼직하고 이목구비가 잘 정돈된 원만한 상호(相好: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와 형상)를 보여 준다.
가느다란 눈은 길게 옆으로 반개(半開)하였고, 각선(刻線)이 선명한 양 눈썹은 완만하게 수평을 이루고 있다. 얼굴 중앙에는 미간에서 내려 뻗은 코가 우뚝하고 양 언저리가 움푹 패인 작은 입술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어려 있다.
어깨에 닿을 듯한 양 귀가 장대하며 비대한 목에는 투박한 삼도(三道)를 돌렸는데 다소 손상된 흔적이 남아 있다. 불신(佛身)은 당당한 어깨에 늘씬하면서도 육중한 원통형의 자태를 보여 준다. 각진 어깨 위로 두터운 통견(通肩: 어깨에 걸침)의 불의(佛衣)를 걸치고 있다. 상체를 감싸 흘러내린 옷자락이 양 손목에서 둔중하게 감기고 있다.
양다리 위로 접혀진 굵은 주름 또한 간략화된 면이 있지만 아직 유려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크게 호를 그리며 발목 부위로 늘어지고 있다. 왼손은 내장(內掌: 손바닥을 안으로 함.)하였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구부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손 모양을 짓고 있다.
대좌와 경계를 이루는 하단부를 시멘트로 보강하였기 때문에 현재로선 발과 옷자락 끝의 형태는 확인할 수 없다. 불상의 대좌는 소담스런 연꽃봉오리의 형태로 윗면은 평평하며 측면은 주위를 빙둘러 화려한 앙련(仰蓮: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를 새겼다.
상단의 경우 내부를 2조(條)의 삼산형(三山形) 화판(花瓣)으로 복잡하게 장식한 반면, 하단은 소판(素瓣)으로 처리하여 변화를 주었다. 불상 재건 시 잡석과 함께 지대석(地臺石)이 매몰되었다고 하며, 현재의 대좌 또한 하부가 지면에 묻혀 있어 조성 당시의 원형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불상의 조성 시기는 괴체감을 강조한 거구의 몸집이나 단순화된 굵은 옷주름 무늬 및 대좌 형식에서 10세기를 전후한 불상 양식이 잔존하고 있다. 그러나 세부에서 엿보이는 추상화된 표현 등을 고려해 볼 때 고려 후기로 놓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