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92.4㎝.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이 보살상은 강릉시 남항진동 한송사 절터에서 발견되었다. 한송사는 문수사(文殊寺)의 속명(俗名)이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돌려받았다.
이 보살상에 대한 기록은 이곡(李穀)의 시문집인 『가정집(稼亭集)』에 수록된 「동유기(東遊記)」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수와 보현의 두 석상은 땅에서 솟아 나온 것이라 한다. 동쪽에 사선비(四仙碑)가 있었는데 호종단(胡宗旦)이 물에 빠뜨려 오직 귀부만 남았다(人言文殊普賢二石像從地湧出者也 東有四仙碑爲胡宗朝(旦)所沈 唯龜趺在耳).”는 기록이 전한다. 이 글은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이 두 구로써 쌍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며, 강릉시립박물관 소장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1963년 지정)과 짝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밖에도 『동문선』에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와 공민왕과 우왕 때에 활약하던 정추(鄭樞) 등이 문수사를 노래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고려시대의 작품이지만 양식적으로는 석굴암 감실(龕室)의 보살상과 같은 통일신라 조각의 전통을 충실히 따른 정교한 작품이다. 두드러진 특징은 머리에 높은 원통형 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한송사지 보살상 뿐 아니라 근처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1963년 지정)과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국보, 2017년 지정)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 지역에서 유행하던 형식으로 보인다.
세부 표현을 살펴보면, 얼굴은 둥글고 통통한 직사각형으로 눈을 반쯤 떴는데 눈초리가 길며 눈썹이 깊이 패었다. 코는 약간 매부리코이고 입술에는 붉은 채색의 흔적이 보인다. 고려 초기의 불상에서 흔히 보이듯이 귀는 양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다. 이마의 커다란 백호공(白毫孔) 속에 박혀 있던 수정이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손은 크고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오른손에는 연꽃 가지를 쥐고 왼손은 검지만 곧게 편 독특한 수인을 취하고 있다. 목에는 굵은 삼도(三道)가 띠처럼 무겁게 새겨지고 수발(垂髮)이 양어깨 위에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리고 상체에는 두꺼운 천의(天衣)를 걸쳤는데 천의와 군의(裙衣)의 옷자락 무늬가 부드럽고 선명하며 주름은 넓고 편평하다.
특히 이 보살상은 다리를 편안히 놓는 서상(舒相)의 자세로 앉았다.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하고 왼쪽 다리를 밖에 두는 좌서상(左舒相)을 취하고 있어서 우서상(右舒相)을 취한 강릉시립박물관의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과 반대되는 자세이다. 또한 반타원형의 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이것은 원 대좌에 끼워 넣기 위한 대좌 촉으로 생각된다. 신복사지 석불좌상처럼 원래의 연화대좌는 따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살상의 명칭은 『동문선』에 기록된 바와 같이 문수보살일 수도 있으나 거기에 대해서는 도상적(圖像的)인 문제와 함께 앞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 초(10세기)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로서 주목될 뿐만 아니라, 일반적 석조 불상의 재료인 화강암 대신 백대리석을 사용하여 제작한 점도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