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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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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문신 · 학자 조열의 유고와 신도비명 · 묘갈명 등을 수록하여 1939년에 간행한 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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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후기 문신 · 학자 조열의 유고와 신도비명 · 묘갈명 등을 수록하여 1939년에 간행한 실기.
내용

2권 1책. 목활자본. 1939년 그의 20세손 덕래(德來)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영한(金寗漢)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후손 현규(顯奎)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

권1에 시 1수, 부록으로 만(挽) 1수, 신도비명·묘갈명·광기(壙記)·운구서원사실(雲衢書院事實) 각 1편, 서(書) 2편, 봉안문(奉安文)·고유문·상량문 각 1편, 권2에 부록으로 축문·고유문·상향축문(常享祝文)·기·두문동서원사실(杜門洞書院事實)·상사문(常祀文)·향사의식(享祀儀式)·유적(遺蹟)·보유(補遺)·부조현비(不朝峴碑)와 음기(陰記)·치제문(致祭文)·상량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 가운데 「합잠연구(盍簪聯句)」는 나라가 망해 적막한 촌가에 돌아와서 꽃을 심으며 몇 잔의 술로 괴로운 심사를 달랜다는 내용으로, 망국의 울분을 표현하고 있다. 부록 중의 만시는 망국의 한을 품고 고향에 돌아와 서로 의지하며 위로하던 친구 이오(李午)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충절을 찬미하고 있다.

「여사보유(麗史補遺)」에는 두문동에 모여든 고려 말 충신들이 충의를 나타내기 위해 햇빛을 가리려고 쓰고 다녔던 데서 패랭이〔蔽陽〕가 유래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부조현비」에는 이성계가 새로 등극해 선비들을 구하려고 경덕궁(敬德宮)에 친림해 과거를 열었으나 선비들이 과장으로 들어오지 않고 고개를 넘어갔다는 유래와, 1740년(영조 16) 영조가 개성에 갔을 때 그 의리를 가상히 여겨 ‘고려충신부조현(高麗忠臣不朝峴)’이라는 비문을 친필로 써서 그 고개에 세웠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밖에 「괘관현비(掛冠峴碑)」와 「두문동비(杜門洞碑)」 및 그 음기(陰記) 등 고려 말 충신들의 절의를 소개하는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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