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탑사 극락전 ( )

고흥 금탑사 극락전 정측면
고흥 금탑사 극락전 정측면
건축
유적
문화재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금탑사에 있는 조선시대 에 창건된 사찰건물. 불전. 시도유형문화재.
정의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금탑사에 있는 조선시대 에 창건된 사찰건물. 불전. 시도유형문화재.
개설

금탑사극락전은 금탑사의 주불전으로 앞면 3칸, 옆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이다. 1985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처음 절을 지을 당시 금탑이 있었다 하여 금탑사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금탑사의 ‘금탑’이란 ‘인도의 아육왕이 건립한 보탑’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역사적 변천

금탑사는 천등산(天登山)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 7세기 말경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초창(初創)이 언제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현재 금탑사에 소장되어 있는 목음각판재(木陰刻板材)를 통해,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사원 전체가 병화로 소실되자 1603년(선조 36) 왕순대사(王淳大師)와 궁현대사(窮玄大師)가 중건하였고, 1692년(숙종 18)에 또 다시 참화를 입었으며, 1845년(헌종 11)에도 천재지변을 당해, 1846년(헌종 12)에 중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기록 이후 오랫동안 극락전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삼성각·성산각·종각·요사채 등이 건립되었다. 1992년 들어 보수된 바 있다.

내용

금탑사극락전은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基壇)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배흘림이 약한 굵고 낮은 원주를 세웠다.

창방과 평방은 굵은 부재로 하여 길게 좌우로 빼냈고, 그 위에 주간포를 배치하였다. 주두(柱頭)와 평방(平枋)이 결구된 부분의 내부에 살미첨차들의 중첩을 보아지로 만들어 용머리를 밖으로 내놓았다. 외삼출목에 내사출목으로 건물 규모에 비하여 출목수가 많다.

살미첨차의 앙서[仰舌]부분은 둥그렇게 굽어 올라가지 않고 수직으로 깎아서 각을 이루고 있다. 첨차의 굽면 역시 둥그렇지 않고 경사지게 깎아서 강직한 맛을 풍기며 다소 큰 느낌을 준다.

내부에는 삼존불을 모셨는데, 2개의 대량에 걸쳐 고주를 세우고 닫집을 만들었으며, 연등천장[椽背天障 : 서까래 사이의 개판이 그대로 치장이 되게 한 반자]이면서 중앙 부분만 우물천장으로 한 후 보개천장(寶蓋天障)을 설치하였다.

보개천장과 내부 공포와의 사이에는 다시 빗천장을 설치하였으며, 용의 몸통 형상을 한 부재로 공포와 대량을 연결하여 설치하였다. 이런 모습은 귀공포에서도 나타난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2분합의 문은 빗살로 그 규모가 대단히 크다.

내부의 단청은 잘 보존되었으나 외부의 단청은 1995년에 새로 하였다. 지붕부의 처마 밑은 공포로 휩싸인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크고 다소 세련미가 떨어진다. 약간 넓은 어간(御間)에는 2구의 주간포가, 협간(夾間)에는 1구의 주간포가 있고, 모서리 부분에는 활주(活柱 : 추녀뿌리를 받는 가는 기둥)를 세웠다.

특징

살미첨차의 장식적인 조각수법을 통해 조선시대 말기적인 모습을 짐작할 수 있고, 사찰이 보관하고 있는 목음각판재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도록』3 (전라남도, 1998)
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
집필자
천득염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