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남파고택은 전라남도 나주시에 있는 일제강점기 남파 박재규 관련 주택이다. 2009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900년대 초에 건립되어 안채·바깥사랑채 등 본디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일자형 주거로 앞뒤가 대칭형인 겹집이며 전후좌우퇴를 두었다. 전형적인 전남지방 자산가의 주거 모습을 보인다. 처마에는 김정희가 쓴 현판이, 방에는 이상만의 현판이 있다. 이 가옥은 근대 호남의 주거 및 생활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주택 관련 4,000여 점의 문서들을 통해 재산 형성과 손실 과정을 알 수 있다.
2009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900년대 초에 건립된 남파고택은 후손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거주해 오고 있으며, 안채, 바깥사랑채, 아래채 등 본디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일자형 주거로 앞뒤가 대칭형인 겹집으로 남부지방 주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특히 전후좌우퇴를 둔 방풍집으로 되어 있다.
이 가옥은 근대 호남 재산가의 주거 및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4,000여 점에 이르는 방대한 옛 문서들을 통해 19세기 말부터 이루어진 재산 형성과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손실 과정을 낱낱이 알 수 있다. 이밖에 상과 부채, 1910년대의 종이, 안장과 말치례 등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자료는 우리나라 근대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안채는 1914년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1917년에 완공되었다. 건축시기는 상량문에 1934년인 갑술(甲戌)로 되어있으나, 실제시기는 1917년 정사년(丁巳年)으로 오른쪽 처마 끝 암막새에 돋을새김 되어있다. 이 건물은 비교적 큰 규모로 우람하고 장중하면서도 기이하리만큼 단아하고 조화롭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구전에 의하면 장흥 관아 건물을 본 떠 지었다고 한다.
바깥사랑채의 건립시기는 1932년으로, 처마에는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쓴 현판이 있고, 방에는 창암(蒼巖) 이삼만(1770∼1845)의 현판이 있다.
이 가옥은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나주 박경중가옥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12월 17일 중요민속자료로 승격되었으며, 나주 남파고택으로 국가유산명이 정정되었다. 현재는 국가민속문화유산이다.
본 가옥은 안채와 바깥사랑채, 아래채, 문간채, 초당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전남지방 자산가의 주거이다. 현재의 모습은 근대기 도시형성과정에서 도로개설로 인하여 문간채의 위치가 사랑채 전면에서 동측면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정면 7칸 반, 측면 2칸에 전퇴, 후퇴, 우측퇴가 있는 ㅡ자형 평면이다. 좌측의 부엌칸을 제외하고 툇마루가 설치되어 앞뒤로 통하며 전퇴-방-후퇴순으로 동선이 연결된다. 규모는 전체면적이 약 160㎡로 전라남도에서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크기로 알려져 있다. 실의 구성은 정면 좌측으로부터 부엌, 큰방, 대청, 작은방의 순이고 큰방의 뒤로는 반칸 깊이의 골방이 있으며 대청 건너의 작은방은 전후 2열로 각각 그 깊이는 1칸씩이다. 정재는 정면 2칸 반, 측면 2칸 반으로 바닥이 흙으로 마감된 봉당(封堂)이다. 정면에는 앞광과 나무청이 있으며 배면에 정재광과 정재마루가 있다.
큰방은 정면 2칸, 측면 1칸 반으로 후면에는 반칸 깊이의 골방을 두었다. 작은방은 정면 1칸, 측면 2칸으로 전후(前後) 2열의 장방형 평면이다. 후면에는 상부의 다락으로 연결되는 벽장이 있다. 작은 방의 후면으로는 함실아궁이를 설치하였고 누마루(공루)를 두었는데 이는 안채의 볼거리 중 하나이다. 며느리가 기거하는 작은방의 퇴를 한층 높여서 꾸미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동북쪽 귀퉁이에 마련하였다.
대청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정면에는 사분합문을 설치하였고, 우측으로는 작은방으로 통하는 문이 설치되었다. 좌측으로는 큰방으로 통하며, 후면으로는 툇마루로 나갈 수 있는 사분합문이 설치되어 사방으로 통할 수 있는 구조이다. 바닥은 우물마루가 깔려있고 벽의 사면으로 연결된 시렁에는 작은 상이나 살림살이 등이 수납되고 있다.
이 가옥은 전남지방의 전형적인 대농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로 일자형 안채를 비롯하여 바깥사랑채, 아래채 등 주거공간의 다양한 기능을 잘 갖추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구조가 건실하고 의장이 깔끔히 잘 마무리되었고, 뼈대가 굵고 웅장한 건축형태를 지니고 있다. 또한 농업뿐만 아니라 사업을 통해 근대 호남 재산가가 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주거 및 생활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본래의 형태에서 변형된 바깥사랑채 및 아래채 등의 가옥 형태와 대지 내에 위치한 유아원, 유치원, 목욕탕 등의 이질적인 건축물의 철거에 대해서는 추후 원형을 찾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적지 않은 고문서와 문헌을 비롯한 생활 유산의 영구 보존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