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은 일제강점기 「난파」·「산돼지」 등의 작품을 낸 극작가이자 연극이론가이다. 1897년에 태어나 1926년에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하여 사망했다. 목포에서 소학교 졸업 후 일본에 유학하여 1924년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유학시절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졸업 후 목포에서 48편의 시와 5편의 희곡, 20여 편의 평론을 발표했다. 해박한 식견과 선구적 비평안을 가지고 당대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 평가된다. 특히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유일한 극작가였다.
호는 초성(焦星) 또는 수산(水山). 장성군수 성규(星圭)의 아들로, 할아버지도 헌관(獻官)이었으며 지주였다. 장성군 관아에서 태어났으며,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구마모토농업학교(熊本農業學校)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입학하여 1924년에 영문과를 졸업했다.
당초부터 시인을 꿈꾸어 구마모토농업학교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대학시절부터는 연극을 꿈꾸어 1920년에 조명희(趙明熙) · 홍해성(洪海星) · 고한승(高漢承) · 조춘광(趙春光) 등과 함께 연극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동우회순회연극단(同友會巡廻演劇團)을 조직하여 국내 순회공연을 했는데, 이 때 공연비 일체와 연출을 담당했고, 상연 극본인 아일랜드의 극작가인 던세니의 「찬란한 문」(단막)을 번역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목포로 귀향해서 상성합명회사(祥星合名會社)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 시기에 시 · 희곡창작 · 평론에 몰두해 48편의 시와 5편의 희곡, 20여 편의 평론을 썼다. 그러나 가정 · 사회 · 애정문제로 번민하다가 1926년에 출분(出奔:도망해 달아남)하여 동경으로 갔고, 그 해 8월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尹心悳)과 현해탄에 투신하여 정사(情死)했다.
그는 보수적인 유교적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서구 근대사상에 철저하게 탐닉했다. 그의 사상적 바탕이 된 니체라든가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는 물론 러시아혁명 이후의 사회주의에도 깊이 빠져 있었다. 이러한 급진적 사상은 연극에서 스트린드베리(Strindberg,J.A.)의 표현주의와 전통부정정신, 쇼(Shaw,G.B)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이게 했으며, 그에게 있어 전통인습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자세를 견지하게 만들었다.
그의 자살 원인이라든가 작품세계도 이러한 사상적 측면에서 고찰될 수가 있다. 시 <죽엄> · <사와 생의 이론> · <죽엄의 이론> 등에서 잘 나타나는 것처럼 그의 시세계는 철저한 현실부정과 개혁의 세계를 보여준다. 희곡세계 또한 시대적 · 가정적 고통을 담은 자전적 세계를 보여준다. <두덕이 시인의 환멸>(1막)은 제목에서도 풍기는 것처럼 전통윤리와 새로운 서구적 윤리의 첨예한 갈등을 그린 것이고, 「이영녀(李永女)」(3막)는 그가 살던 목포 유달산 밑의 사창가를 무대로 빈민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자연주의 수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대표작으로 꼽히는 「난파(難破)」(3막7장)와 「산돼지」(3막)는 우리 나라 문예사상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으로서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신파극만 존재했던 1920년대로서는 대단히 전위적인 실험극이다. 「난파」는 그가 자살한 해인 1926년 봄에 쓴 작품으로서, 복잡하게 얽힌 유교적 가족구조 속에서 현대적인 서구윤리를 지닌 한 젊은 시인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매우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이 작품은 그대로 그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산돼지」는 친구 조명희의 시 「봄 잔디밭 위에」에서 암시를 얻어 쓴 작품으로, 좌절당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을 음울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그의 사상인 사회개혁을 잘 보여주며, 지극히 몽환적으로 끌고간 것이 특징이다. 그가 이 작품을 가리켜 자신의 ‘생의 행진곡’이라고 고백했듯이, 개화지식인의 임상보고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는 또한 뛰어난 평론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에서 「소위 근대극에 대하여」 · 「자유극장(自由劇場) 이야기」 · 「사옹(沙翁)의 생활」 · 「구미(歐美) 극작가론」은 탁월한 논문이다. 그리고 「쓰키지소극장(築地小劇場)에서 인조인간(人造人間)을 보고」라는 글은 연극평의 한 모범을 보여 준다. 또 「창작을 권합네다」라는 글에서 표현주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했으며, 전통적 인습타파를 작품 주제로 삼은 한국작가들에게는 표현주의가 가장 알맞은 창작방법이라는 논지를 폈다.
그는 대단히 진실적인 문학관을 가지고 있어서 「 이광수(李光洙)류의 문학을 매장하라」 · 「아관(我觀) 계급문학(階級文學)과 비평가」라는 논문을 통해 계몽적 민족주의와 인도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조선말 없는 조선문단에 일언(一言)함」이라는 평론에서는 서양의 경우를 예로 들어 순수한 조선어의 부흥과 개량을 역설했고, 새 문전(文典)의 제정과 사전의 출현, 구비전설과 민요 · 동요의 수집을 촉구했고, 우리의 독특한 시가율(詩歌律)을 가질 것과 외국문학의 우리말 번역, 신문 · 잡지의 대중화 등을 주장했다.
그는 자기가 겪은 시대고를 적절히 희곡 속에 투영함으로써 당시 계몽적 민족주의나 인도주의 내지 감상주의에 머물렀던 기성문단을 훨씬 뛰어넘은 선구적 극작가였으며, 특히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점에서 유일한 극작가이다. 또한, 해박한 식견과 선구적 비평안을 가지고 당대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