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수부(秀夫), 호는 창주(滄洲)·만취(晩翠)·물염정(勿染亭). 아버지는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추증된 나덕용(羅德用), 어머니는 홍주송씨(洪州宋氏) 송정순(宋庭筍)의 딸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615년(광해군 7) 문과에 급제하여 거산찰방(居山察訪)에 제수된 후 예조·병조의 낭관(郎官)과 정언(正言)·지평(持平)·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존현모의(尊賢慕義) 사상이 높아 1630년(인조 8)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부임시 먼저 효자·열부 및 이황(李滉)의 묘를 참배하였으며,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은 그를 존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에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몽진(蒙塵)하자 그는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임금을 호종(扈從)하였는데, 속히 환도하여 적(賊)의 동태를 살피라는 어명을 받고 돌아오던 길에 상주목사(尙州牧使) 이유성(李惟誠)을 만나 의병(義兵)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으나, 강화가 이루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물염정(勿染亭)에서 학문을 닦으며 여생을 보냈다.
또한 존명(尊明)사상이 높아 조그마한 단(壇)을 쌓아 놓고 조석으로 배향하였는데, 어느날 명나라 황제가 현몽(現夢)하여 그 단(壇)을 대명단(大明壇)이라고 하라는 계시가 있었다. 저서로는 『창주문집(滄洲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