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나가, 1441년(세종 23) 중추원부사가 된 뒤 중추원사를 거쳐, 형조참판 · 사헌부지평 · 경주부윤 ·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조급하며 특별한 재능이 없음에도 관품이 종1품에 이르자 주위로부터 평판이 좋지 않았다.
특히, 1454년(단종 2)에는 학생 심중륜(沈中倫)과 노비문제로 쟁송을 일으켜 몇 개월간 송사를 계속하여 조정의 지탄을 사기도 하였다. 딸과 담양군(潭陽君) 이거(李璖: 세종의 아들) 사이에 혼담이 있었으나, 담양군이 일찍 죽음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 연경곡산군(延慶谷山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의성군(宜城君)으로 개칭되었다. 시호는 안호(安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