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종이 바탕에 채색. 세로 37.3㎝, 가로 204㎝. 1629년(인조 7) 6월 5일 남대문 밖 관지(官池) 근처에 있던 홍첨추(洪僉樞)의 집에서 베풀어졌던 70세 이상된 기로(耆老)들의 모임을 사실적으로 도회한 필자 미상의 기록화이다.
이 그림은 대구 서씨 집안에서 19세기경에 화첩 형식으로 개모하여 보관해 온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횡권(橫卷)으로 개장되어 있는 상태이다. 연회에 참가한 기로는 이인기(李麟奇) · 윤동로(尹東老) · 이유간(李惟侃) · 이호민(李好閔) · 이권(李勸) · 홍사효(洪思斅) · 강인(姜絪) · 이귀(李貴) · 서성(徐渻) · 강담(姜紞) · 유순익(柳舜翼) · 심론(沈惀) 등 12명이다. 가선대부 청평군(嘉善大夫靑平君) 심론은 당시 68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낙양기로회(洛陽耆老會) 적겸예(狄兼譽)의 고사를 따라 참가하게 되었다.
작품은 전서체(篆署體)의 제목, 기로회 장면, 좌목(座目: 서열을 적은 목록), 예조 참판 이경직(李景稷)의 서문, 장유(張維)의 지문(識文), 1691년(숙종 17) 12월 11일자로 된 박세당(朴世堂)의 기문(記文)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좌목은 이날 연회의 좌차(座次)를 따라 나이 순으로 배열되었으며 부친을 동반하여 함께 참석한 자제들의 성명 관직도 아울러 기재되어 있다.
이경직은 기로 중의 한 명인 이유간의 아들로 회사(繪事)를 주관하였으며 좌목은 그의 동생인 좌부승지 이경석(李景奭)이 기록하였다. 박세당의 글에 의하면 원래는 기로의 수대로 12본을 제작하여 각자 집에 1본씩 보관하였으나 박세당이 기문을 쓴 당시에는 이미 11본이 산실되고 오직 이인기의 5세손이 1본을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세당은 바로 이 그림을 보고 기문을 지었다는 것이다.
한편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의 <남지기로회도>는 계축(契軸) 형식으로 화면 우측 하단에 ‘李起龍寫(이기룡사)’라고 쓰여 있어서 이를 통해 그림의 원작자를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의 <남지기로회도>와 비교해 보면 내용은 동일하나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배열된 서까래의 방향, 건물 및 인물의 형식화된 이중의 윤곽선 처리 등 입체감을 의식한 표현에서 시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