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화는 특정한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그 내용을 시각적으로 전달한 그림이다. 당대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하고 과거의 실제 사건과 행사를 내용으로 한다. 기록적인 성격의 그림 중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전하는 본격적인 기록화는 모두 조선 시대의 작품인데 궁중기록화와 사가기록화가 있다. 궁중기록화에는 의궤도나 궁중 행사도 등이 있다. 사가기록화로는 의령남씨와 대구서씨의 가전화첩이 알려져 있다. 기록화는 왕과 양반 관료들의 생활의 일단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문자 이외에 특별한 기록 수단이 없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그림이 지닌 시각 매체로서의 기능에 의존하여 다양한 종류의 기록화를 남겼다. 기록화는 당대의 인물과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였다는 측면에서 넓게는 풍속화(風俗畵)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행사를 내용으로 한다는 면에서는 역사화(歷史畵)의 범주에 포함된다.
기록적인 성격의 그림 중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악3호분의 「대행렬도(大行列圖)」나 덕흥리고분의 「13군태수하례도(13郡太守賀禮圖)」처럼 묘 주인이 생전에 가진 특정한 행사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은 서사적인 그림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문헌으로 확인되는 단편적인 기록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왕의 국정 운영을 효율적으로 돕거나 치적을 기념하기 위해 기록화가 그려졌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남아 있는 작품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현재 전하는 본격적인 기록화는 모두 조선시대의 작품이다.
기록화는 내용상 왕실과 국가의 주요 행사와 사건을 그린 궁중 기록화(宮中記錄畵)와 양반 관료들이 자신의 관직 생활과 관련된 기념할 만한 사건을 그린 사가 기록화(私家記錄畵)로 대별된다. 그 외에 「통신사행렬도」, 「동래부사접왜사도」, 「한일통상조약기념연회도」와 같이 대일외교 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기록화와 변박(卞璞)의 「동래부순절도」 등의 전승 및 애국 순절을 기린 전쟁기록화가 있다.
궁중기록화는 의궤에 수록된 의궤도(儀軌圖)와 궁중행사도(宮中行事圖)로 크게 나뉜다. 의궤도는 행사의 한 절차를 예전(禮典)에 의거해 그려서 왕의 심의를 거친 뒤 실제 행사에 참고 자료로 사용했던 그림이다. 의궤도는 대개 배경이 배제된 행렬도 형식이다.
예를 들면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의 왕비예궐반차도(王妃詣闕班次圖), 『책례도감의궤(冊禮都監儀軌)』의 책인내입반차도(冊印內入班次圖),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의 발인반차도(發靷班次圖)가 그것이다.
한편 1743년(영조 19)의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에는 행사도 형식의 채색화를 수록해 의궤도의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였다. 그 후 1795년(정조 19) 정조의 화성 현륭원(顯隆園) 전배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와 화성 축조에 관한 기록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의 권수(卷首)에는 주요 의식을 행사도 형식의 목판화로 제작하여 실었다.
그 영향을 크게 받은 19세기의 진찬 · 진연 의궤에도 같은 시기에 편찬된 다른 종류의 의궤와 달리 목판화로 제작된 여러 진찬도(進饌圖)와 진연도(進宴圖)가 수록되어 있다.
의궤도가 공식적인 관찬 기록물의 하나였던 반면에 궁중행사도는 행사에 참여한 관원들이 주도하여 관청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당시에는 장황(粧䌙) 방식에 따라 계축 · 계첩 · 계병으로 불렸다.
궁중행사도는 1560년(명종 15)에 제작된 「서총대친림연회도(瑞葱臺親臨宴會圖)」에서부터 19세기의 진찬 · 진연도 병풍까지 진연, 진찬, 진작(進爵), 친림사연(親臨賜宴), 곡연(曲宴) 등 각종 궁중연향을 그린 그림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연향도(宴享圖) 외에는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 같은 과거도(科擧圖), 왕이 친림한 인사 행정의 광경을 그린 「친정도(親政圖)」, 그리고 1719년의 숙종의 『기사계첩(耆社契帖)』, 1744년의 영조의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 등 왕이 기로소에 들어가거나 그 곳에 행차한 일을 기념한 그림이 있다.
또 영조의 치적 중 하나인 청계천 준설사업에 관한 기록과 그림을 묶은 『준천계첩(濬川契帖)』(1760년), 그리고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1795년) 등은 18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궁중행사도로 꼽을 수 있다.
사가기록화로는 각 관청의 계회도, 동방(同榜) · 회방(回榜) · 동갑(同甲) 등을 기념한 계회도, 기영 · 기로회도, 경수연도(慶壽宴圖), 회혼연도(回婚宴圖), 사궤장연도(賜几杖宴圖), 연시연도(延諡宴圖), 신임연도(新任宴圖) 등의 그림이 있다.
18세기 후반에는 집안의 조상과 관련된 행사도를 모아 가전화첩(家傳畵帖)으로 꾸며 가보(家寶)로 전승하기도 하였다. 현재 의령 남씨와 대구 서씨의 가전화첩이 알려져 있다.
기록화의 특징은 첫째, 거의 대부분 도화서(圖畵署) 소속의 화원(畵員)이나 지방 관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직업화가인 방외화사(方外畵師)가 그린 작품이다.
둘째, 모두 오방색(五方色)을 기본으로 한 진채(眞彩)를 사용한 채색화이다.
셋째, 특히 궁중기록화는 모두 왕이 친림하거나 예제(禮制)로 정해진 행사를 그린 것이므로 화면의 구성과 도상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춘관통고(春官通考)』 등 예전에 설명된 의주(儀註)를 근거로 하고 있다.
넷째, 기록화는 사실성을 생명으로 하는 만큼 행사의 내용과 현장의 모습을 알기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한 나머지 때로는 한 화면에 여러 시점을 혼용하였고 원근을 무시하기도 했지만 인물과 건물의 배치만은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다섯째, 기록화는 선례(先例)를 존중하고 참고하는 태도를 중시하였으므로 양식적으로 큰 변화가 없는 보수성이 강한 그림이다. 하지만 18세기 후반부터는 서양화법(西洋畵法)의 영향을 받아 건물과 인물의 표현 양식에 변화를 보였다.
여섯째, 기록화는 애초에 여러 본이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집안의 보물로 전승되는 동안 개모(改模)되거나 이모(移模)되는 예가 빈번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기록화는 왕과 양반 관료들의 유교적인 의식과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그림이며, 그들의 행적과 생활의 일단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