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계첩』은 1719년(숙종 45)에 숙종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계첩이다. 개인 소장본은 보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은 국보로 각각 지정되었다. 이 계첩은 기로소에서 주관하여 제작하였다. 임방이 쓴 서문, 숙종이 지은 어제, 김유의 발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첩의 특징은 기록화 5장면을 추가하여 행사의 전모를 화첩 안에 담은 점이다. 다른 궁중 기록화에서 보기 어려운 제작 실무자 이름이 적혀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기사계첩』은 18세기 전반 기로소와 관련된 궁중 기록화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
『기사계첩(耆社契帖)』은 1719년 2월에 59세가 된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기로소에서 주관하여 제작한 계첩이다.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은 태조가 기로소에 들어갔다는 몇몇 관료들의 개인 문집 기록에 의거한 것이다. 관찬 사료에 공식적인 기록은 없었지만 태조의 자취를 계술하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명분에서 숙종은 기로소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기사계첩』은 기로신 중의 한 명인 좌참찬 임방(任埅, 16401724)이 쓴 계첩의 서문, 경현당 사연(賜宴) 때 숙종이 지은 어제(御製), 기로소에 봉안된 어첩(御帖)에 쓴 대제학 김유(金楺, 16531719)의 발문, 각 의식에 참여한 기로신들의 명단, 5폭의 그림, 기로신들의 좌목(座目), 그들의 반신상 초상화와 축시, 계첩을 제작한 실무자 명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5폭의 그림 중 첫 장면은 「어첩 봉안도(御帖奉安圖)」이다. 숙종은 당시 시력이 약화된 상태였으므로 왕세자가 어첩에 대사(代寫)한 뒤 이를 기로소에 봉안하였다. 그림에는 기로신들이 어첩을 봉안하러 가는 행렬이 그려졌다.
이튿날인 2월 12일 기로신들이 경희궁 숭정전에서 진하례를 올리는 광경을 그린 「숭정전 진하전도(崇政殿進賀箋圖)」, 4월 18일 경희궁 경현당에서 기로신들에게 내려진 친림 사연의 모습을 그린 「경현당 석연도(景賢堂錫宴圖)」, 경현당 석연에서 하사받은 은배(銀盃)를 받들고 기로소로 돌아가는 기로신들의 행렬을 묘사한 「봉배 귀사도(奉盃歸社圖)」, 같은 날 기로소에서 계속된 기로연을 묘사한 「기사 사연도(耆社賜宴圖)」가 차례로 실려 있다.
좌목에 실린 기로신은 이유(李濡), 김창집(金昌集), 김우항(金宇杭), 황흠(黃欽), 최규서(崔奎瑞), 강현(姜鋧), 홍만조(洪萬朝), 이선부(李善溥), 정호(鄭澔), 신임(申銋), 임방 등 모두 11명이었다.
그러나 최규서는 서울에 없었기 때문에 모든 의식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계첩에 초상화도 싣지 못하였다. 또 임방은 당시 80세였는데 숙종이 어첩을 봉안한 후에 특명으로 품계를 올려 받아 뒤늦게 기로당상이 되어 경현당 석연에 참가하게 되었다.
계첩은 기로신에게 나누어 줄 11건과 기로소 보관용 1건을 합쳐 총 12부가 제작되었다.
『기사계첩』에는 다른 궁중 기록화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제작 실무자의 이름이 화첩의 맨 마지막에 적혀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계첩 제작을 감독한 관리[監造官] 고정삼(高挺參)과 글씨를 쓴 서사관(書寫官) 이의방(李義芳) 외에도 그림을 그린 5명의 화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김진여(金振汝), 장태흥(張泰興), 박동보(朴東普, 16631735 이후), 장득만(張得萬, 16841764), 허숙(許俶, 1688~?) 등은 모두 어진 도사(御眞圖寫)에 참여한 경력을 가진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다.
『기사계첩』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 2019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본과 개인 소장본이 모두 197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도 삼성미술관 리움과 연세대학교 박물관 소장본도 알려져 있다. 2020년 12월에는 풍산홍씨 후손가에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 기사계첩이 두번째로 200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기사계첩』은 기로소와 관련된 궁중 기록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숙종은 왕이 기로소에 들어가는 의식을 국가적인 행사로 처음 시행하였으며 기로신들은 이러한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초상화 외에 기록화 5장면을 추가하여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편제의 계첩을 제작하였다. 화원들은 남다른 정성을 들여 행사의 전모를 화첩 안에 고스란히 담는 데에 성공하였고 초상화도 18세기 초의 전형적인 화법으로 그려졌다.
『기사계첩』은 제작 일시가 뚜렷하고 제작 실무자 명단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18세기 전반 궁중 기록화 및 초상화의 기준작이 될 만한 작품이다. 특히 영조가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한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의 범본이 되었다는 점에서 후대에 미친 영향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