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차도는 조선 시대 국가 의례에 참여하는 문무백관 및 기물 등의 정해진 위치와 행사 장면을 묘사한 기록화이다. 국가 의례에서 차례와 위치를 숙지시키고 점검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었다. 그림으로 그린 회화식 반차도와 글자로 표시한 문 반차도가 있다. 반차도는 보통 의례 때 활용된 다음 후대에 참고하기 위해 의궤에 수록되었다. 17세기 이후 현전하는 의궤에 170여 종의 회화식 반차도가 포함되어 있다. 또 두루마리 형식으로 제작된 독립 반차도 30여 건이 전해진다. 18세기 영·정조 시기에 반차도를 활용하면서 의례의 폭이 확장되었다.
반차도는 국가 의례에 예모(禮貌)와 위엄을 갖추기 위해 반차(班次)를 숙지시키고 검칙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었다. 열을 지어 나아가는 행렬처럼 그린 행렬식 반차도와 의례 공간에서의 설위(設位) 반차를 글자로 표기한 배반도(排班圖) 형식이 있다. 또한 표현 방법에 따라 그림으로 그린 회화식 반차도와 글자로 표시한 문(文) 반차도가 있다. 반차도는 보통 의례 거행 시에 지침으로 활용된 다음 후대에 참고하기 위해 의궤에 수록되었다. 또는 관청에서 업무와 관련된 배반도를 제작 소장하면서 평상시 업무 지침으로 삼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 현전하는 의궤에는 가례, 책례, 존숭, 국장(예장), 부묘, 천릉, 어진 모사(도사), 진전 증건‧영건, 종묘 개수‧증수와 관련된 170여 종의 의궤에 회화식 반차도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두루마리 형식으로 제작된 독립 반차도 30여 건이 전해진다. 18세기 영‧ 정조 연간부터 국왕권 강화 및 예제(禮制) 정비와 함께 반차도를 활용하면서 의례의 폭이 확장되고 제작 수준도 높아졌다.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는 전대(前代)의 형식을 상투적으로 따르는 경향을 보이다가, 1908년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회화식 반차도는 더 이상 제작되지 않고 문 반차도로 약식화하였다.
① 행렬식 반차도: 행렬식 반차도의 구성은 의례마다 다르다. 가례 반차도는 17∼18세기 전반에는 별궁에서 친영례를 행하고 동뢰연을 위해 신부가 대궐로 가는[예궐(詣闕)] 반차도만 제작되었다. 1759년 영조와 정순왕후의 가례 때부터 왕의 친영 행렬을 묘사한 반차도가 추가되었다. 국왕 가례 관련 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친영 반차도와 1795년 정조의 화성 원행 행렬을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 「반차도」는 조선 후기 국왕의 행렬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책례 반차도는 책례에 필요한 교명‧ 책‧인, 왕세자의 연과 의장 등을 제작하여 대궐로 내입하는 반차도이다. 존숭(추숭) 때의 반차도는 존호(추상존호)의 책‧ 보를 제작하여 대궐로 내입하거나 존호를 올릴 대상자(혹은 신주)가 있는 곳으로 배진해 가는 행렬을 그린 것으로 정조 연간부터 제작되었다.
국상 때에는 빈전에 모시던 혼백과 재궁, 책‧보류와 부장품 등을 산릉으로 배진해 가는 발인 반차도가 제작되었다. 부묘 때에는 혼전에 모시던 책 · 보류와 신주를 담제(禫祭) 후 종묘로 봉안해 가는 반차도가 제작되었다. 능원 천봉 때에는 발인 반차도에 준하여 제작되었다.
또한 선대 왕이나 왕의 어진(御眞)을 그려 진전(眞殿)에 봉안할 때, 진전을 영건하거나 중수할 때에도 어진을 모셔 가는 행렬이 반차도로 제작되었으며, 종묘나 영녕전을 개수 혹은 증수할 때에도 신주를 다른 곳으로 이안하고 환안하는 행렬이 반차도로 제작되었다. 왕의 어진이나 신주에게는 살아 있는 국왕에 걸맞은 위의가 부여되었다.
반차도의 구성은 중앙 열에 양산(陽繖)과 청선(靑扇) 같은 중요 의장, 의례 주인공의 책‧보, 재궁과 신주 혹은 당사자를 모신 가마류, 담당 차비관을 배치하고, 상하 열에 의장기‧인로인(引路人)‧내시 등 시위 관련 사항을 배치하는 삼단으로 되어 있다. 중앙 열의 인물은 후면에서 본 시점[후면관(後面觀)]으로 전방을 향해 엎어진 모습으로, 가마류는 측면에서 본 시점[측면관(側面觀)]에 단면 혹은 입체형으로 묘사되며 상하 열의 의장기 담지군과 시위군사들은 중앙 열을 향해 엎어진 측면관으로 묘사되었다. 여러 시점에서 본 행렬을 삼단구성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반차도의 기본 형식이다.
반차도는 17세기 전반까지는 필사하여 제작하다가 1661년 『효종부묘도감의궤』에서부터 상을 도장처럼 새겨서 찍고[인각(印刻)], 모자와 의장기 같은 지물(持物)을 추가로 그려 넣은 뒤 채색하여 완성하는 인각채색법(印刻彩色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인각채색법은 반차도 독자의 제작법으로, 인물의 이목구비나 움직임 묘사의 수준이 높아지고, 중앙 열 가마채와 가마의 묘사 방식에 입체감과 공간감이 구현되는 등 기법 및 표현 면에서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그러나 1907년의 『고종영친왕존봉도감의궤』를 끝으로 이후부터 일제강점기에는 회화식 반차도가 더 이상 제작되지 않고 문 반차도로 약식화하였다. 이 시기 고종‧ 순종의 어장과 부묘 관련 의궤에 수록된 반차도는 모두 문 반차도이다.
한편 어람용 의궤의 반차도는 행렬 구성과 공간 구성법은 분상용 의궤 반차도와 동일하지만, 인각채색법을 쓰지 않고 정교하게 필사하고 세밀하게 채색을 하여 완성하였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는 어람용 의궤의 반차도에서도 인각채색법을 활용하였다.
② 배반도: 의례 공간에서의 반차를 도해한 대표적인 배반도로 「정아조회지도(正衙朝會之圖)」가 있다. 「정아조회지도」는 정아 즉 인정전에서 거행되는 조하 의주를 도해한 것으로, 1778년(정조 2) 4월 정조의 명에 의해 목판으로 새겨져 인출 배포된 것이다. 의궤에 수록된 것은 아니지만 배반도로 제작된 대표적인 반차도로서, 담당 관아에서 소장 업무를 숙지하기 위해 비치하였다.
의궤에 수록된 배반도의 대표적인 예는 19세기 진작‧진찬‧진연 등 연향 의궤의 문 반차도이다. 19세기에 들어 왕실 어른에게 올리는 연향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연향 공간에 위치할 상탁(床卓)과 향안(香案) 등 각종 기물, 의장, 담당 차비와 내외빈의 자리, 악대의 위치를 글자로 적어서 지침으로 삼도록 한 것이다. 연향 공간의 전체도와 세부도를 글자로 표시한 문 반차도는 1827년의 진작 과정을 기록한 『자경전진작정례의궤』에 수록된 6종의 문반차도(慈慶殿圖, 殿內圖, 東補階圖, 西補階圖, 外補階 登歌圖, 外補階 軒架圖)를 필두로 이후의 연향 의궤에 빠짐없이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