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영녕전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묘에 있는 조선전기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이안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종묘 영녕전은 1421년(세종 3) 정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태실이 부족하여 별묘를 건립하여 태조의 4대조를 함께 옮겨 모신 곳이다. 이후 정전에 계속 모시지 않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대에 재건하고 이후 현종과 헌종 대에 중수하였다. 17세기 중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구조와 장식·색 등이 제사 공간에 맞게 간결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조선에서는 국왕이 승하하면 종묘 정전에 모셔두었다가 5세의 원조(遠祖)가 되면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게 되므로 영녕전을 천묘(遷廟)한다는 뜻의 ‘조묘(祖廟)’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영녕전에는 중앙의 4실을 양 협실(夾室)보다 높게 꾸미고 각 실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 · 익조(翼祖) · 도조(度祖) · 환조(桓祖)와 왕비들의 신주를 모셨으며, 서쪽 제5실에서부터는 정종(定宗)과 왕비, 문종(文宗)과 왕비, 단종(端宗)과 왕비, 덕종(德宗)과 왕비, 예종(睿宗)과 왕비, 인종(仁宗)과 왕비, 명종(明宗)과 왕비, 원종(元宗)과 왕비, 경종(景宗)과 왕비, 진종(眞宗)과 왕비, 장조(莊祖)와 왕비,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영친왕)와 태자비 등 32위의 신주가 제16실에 이르기까지 모셔져 있다.
의례(儀禮)를 중요시하던 조선시대에는 특히 왕가(王家)의 조상신(祖上神)을 제사 지내는 종묘를 중요시하여, 건축 형식도 엄격하게 규정된 제도를 따르게 마련이었다. 즉, “천자(天子)는 7묘(廟), 제후(諸侯)는 5묘”라고 제도화되어 있었고, 이를 원형으로 삼아 종묘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죽은 왕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건물의 증건이나 신축이 필요하게 되었다. 즉, 세종대에 이르러 정종이 죽자 그의 신주를 모실 방이 없어서 이미 정전에 모셔져 있는 4조(穆祖 · 翼祖 · 度祖 · 桓祖)의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였다.
이 때 의논을 거듭하여 정전 서쪽에 별묘를 두는 송나라의 제도가 시의(時宜)에 적절하다고 하여 채택하였다. 이것이 영녕전(永寧殿)을 창건하게 된 동기이다.
1421년 당시 건물의 규모는 태실(太室) 4칸에 양옆 익실(翼室) 각 1칸을 합하여 모두 6칸이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재건할 때 정전 4칸, 동서익실 각 3칸으로 모두 10칸 건물로 재건되었다. 다시 1667년(현종 8)에는 동서익실의 좌우 끝에 각각 1칸씩 늘어나 태실 4칸, 좌우익실 각 4칸으로 모두 12칸 건물이 되었다.
또 1836년(헌종 2)에 증건되어 태실 4칸, 좌우익실 각 6칸으로 모두 16칸 건물이 되었으며 이 규모가 현재 영녕전의 규모이다. 이렇듯 건물의 크기는 계속 확대되었으나 그 때마다 전체를 새로 지은 것은 아니며, 일부는 헐어 새로 짓고 일부는 새로 첨가하는 등 특이한 변천을 겪었다. 양식적인 면에서 17세기 중기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영녕전은 정전의 서쪽에 남향으로 세워져있는데, 구성형식을 보면 4면을 낮은 돌담으로 둘러막아 의례를 행할 수 있는 외부공간을 형성하고, 정면인 남쪽에는 3문 형식의 남문을, 동쪽과 서쪽 담에는 각기 동문 3칸, 서문 1칸을 두어 제사 지낼 때의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남문 안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2벌로 쌓아 나지막한 월대(月臺)를 조성하고, 그 한복판에 상징적인 중심이자 건축의 기하학적인 중앙 축으로서 신도(神道)를 두었다. 신도의 끝에는 다시 월대를 쌓아 제관(祭官)들이 건물 앞에서 의례의 절차를 거행할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이 상월대(上月臺) 위에 장대석 1벌로 기단을 쌓고 여기에 가운데 태실 4칸, 좌우 각각 익실 6칸씩을 두어 16칸을 조성한 건물을 세우고, 익실 양끝 툇간에 덧붙여서 동월랑(東月廊)과 서월랑(西月廊) 5칸씩을 연결하였다.
태실과 익실을 합한 정전 부분의 평면구성을 보면 너비 방향으로는 정전부와 월랑부로 나누어지고, 다시 정전부는 태실과 좌우익실로 나누어진다. 깊이방향으로는 월대에 면하고 있는 맨 앞 1칸은 모두 퇴(退)로 개방하였고, 그 뒤로는 칸마다 문 2짝을 달아 안으로 열게 만들었다. 이 문 내부는 각 실의 구분 없이 옆으로 탁 터진 2칸 깊이의 공간이 있고, 다시 그 안쪽에 각 실을 나누고 신주를 모신 감실(龕室)을 마련하였다. 즉, 깊이 방향으로 본 평면구성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제사를 거행하는 예법을 충실히 따를 수 있도록 이루어져 있다.
한편, 동월랑과 전퇴(前退) 및 서월랑 앞 일부에는 바닥에 전돌을 깔아서 의례의 절차에 따른 통로를 마련해 놓았다. 동월랑과 서월랑은 모두 월랑이라고 불렀으나 평면구성상 차이점이 있는데, 동월랑은 앞쪽 4칸을 퇴로 개방하고 익실과 연결된 부분 1칸만을 3면을 둘러막고 퇴 쪽으로 문을 내었으며, 서월랑은 5칸 모두를 벽으로 둘러막고 가운데 칸에만 두짝문을 달았다.
건물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원기둥의 열(列)과 세 부분으로 나뉜 거대한 지붕면에 의하여 간결하고도 장중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어졌는데, 이는 영녕전이 제사를 드리는 일종의 신전(神殿) 건축이라는 목적에 맞도록 하였기 때문이며, 구조와 장식 · 색채 등에도 간결함 · 장중함 · 상징성 등을 강조하는 설계의도를 잘 표현하고 있다.
건물의 지지체인 주춧돌과 원기둥을 두툼하고 굵게 만들고 이 위에 간결하게 이익공(二翼工)을 짜올려 거대한 지붕을 받치고 있다. 같은 이익공이면서도 영녕전의 태실은 바깥으로 출목을 두어 익실과 위계에 차별을 두었다. 중앙계단의 섬돌과 문설주 양옆에는 태극무늬를 새겨 놓았다. 색채는 붉은색과 청록색 2색만을 사용하여, 흔히 밝고 화려한 다채색을 칠한 궁궐과는 상당한 대비를 보이고 있다.
종묘정전과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으나, 벽체와 기둥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정전에서 전퇴의 열주(列柱)를 제외한 모든 기둥을 벽 속에 숨긴 데 반하여, 영녕전에서는 원기둥을 노출시켜서 벽을 나누고 있다.
17세기 중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이 건물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는 목적에 맞도록 구조와 장식 · 색 등이 간결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었다. 일부 구조에서는 옛 방식을 따라 입구에 널문을 달고 발을 쳤으며, 건물 안쪽 방 사이에는 담벽을 치지 않고 발을 늘여 나누어 놓았다. 신위를 모시는 집으로 옛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