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남씨가전화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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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조선시대 태조 대부터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의령남씨 가문의 다섯 인물들이 참여했던 특정 궁중 행사를 그린 기록화.
작품/서화
소장처
홍익대학교 박물관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서울특별시
종목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2016년 04월 07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와우산로 94 (상수동, 홍익대학교)
내용 요약

『의령남씨가전화첩』은 조선시대 태조 대부터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의령남씨 가문의 다섯 인물들이 참여했던 특정 궁중 행사를 그린 기록화이다. 이를 기념하는 그림과 관련 기록을 묶어 「태조망우령가행도」, 「중묘조서연관사연도」, 「명묘조서총대시예도」, 「선묘조제재경수연도」, 「영묘조구궐진작도」 등 5개의 개별 화첩으로 꾸민 것이다. 2016년 4월 7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홍익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태조 대부터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의령남씨 가문의 다섯 인물들이 참여했던 특정 궁중 행사를 그린 기록화.
내용

조선 태조 연간, 중종 연간, 명종 연간, 선조 연간, 영조 연간에 의령남씨(宜寧南氏) 가문의 남재(南在, 1351~1419), 남세건(南世健, 1484~1552), 남응운(南應雲, 1509~1587), 남이신(南以信, 1562~1608), 남태회(南泰會, 1706~1770) 등이 각각 궁중 행사에 참여했던 특정 사건이나 행사를 기념하는 기록화를 묶어 만든 화첩이다. 현재는 분리되어 「태조망우령가행도(太祖忘憂嶺駕幸圖)」, 「중묘조서연관사연도(中廟朝書筵官賜宴圖)」,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葱臺試藝圖)」, 「선묘조제재경수연도(宣廟朝諸宰慶壽宴圖)」, 「영묘조구궐진작도(英廟朝舊闕進爵圖)」 5개의 개별 화첩으로 꾸며져 있다.

「태조망우령가행도」는 태조가 군신들과 함께 동성(東城) 밖 30리 되는 지점에 있는 자신의 장지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태조의 모습은 어좌로만 상징적으로 묘사되었다. 14세기 말엽 태조가 자신의 주1을 물색하고 있던 중에 남재의 수지(壽地)를 마음에 들어하여 수릉으로 정하고, 대신에 남재의 장지를 무학대사로 하여금 골라주도록 하였다. 일이 마무리되자 태조는 기뻐하며 남재에게 “군신이 모두 수지를 갖추었으니 근심을 잊을 만하다.”하며 잠시 어가(御駕)를 세우고 머물렀던 자리를 ‘망우령(忘憂嶺)’이라 불렀다. 남재는 자신의 장지를 태조가 수릉으로 쓰게 되었음을 영광으로 여겨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림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원작이 아닌 후대에 다시 그린 중모본(重模本)으로 추정된다. 특히 양식적으로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鄭敾)진경산수화풍으로 산수를 처리하고 있어 「영묘조구궐진작도」로 화첩을 완성할 때인 영 · 정조 연간에 그려진 것으로 보고 있다.

「중묘조서연관사연도」는 인종이 왕세자로 있던 1535년(중종 30)에 경복궁에서 자신을 가르친 39명의 서연관들에게 베푼 주2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승정원 우부승지 남세건이 참석하였다.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을 중심으로 남쪽의 근정문, 동쪽의 일화문, 서쪽의 월화문을 연결하는 회랑으로 화면을 구획하여 그 안에 법연의 장면을 왼쪽으로 치우쳐 그려 넣었다. 회랑 너머 산수는 16세기 산수 양식인 단선점준(短線點皴)으로 처리되어 있어, 이 그림은 행사 당시인 1535년경에 제작된 원화(原畵)로 보고 있다.

「명묘조서총대시예도」는 명종이 서총대에 친림한 가운데 거행된 문무시예(文武試藝)에서 남응운이 당대 문장과 묘사(妙射)에 으뜸인 자들을 물리치고 거귀자(居鬼者)로 뽑혀 상으로 말 두 필을 하사받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회한 것이다. 「중묘조서연관사연도」와 마찬가지로 배경의 산을 짧게 선을 그은 단선점준으로 표현되어 있어, 「명묘조서총대시예도」의 제작 연도를 16세기 중엽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는 재신(宰臣)들의 노모를 위한 경수연의 전모를 다섯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화첩이다. 1605년(선조 38) 4월 서평부원군 한준겸(韓浚謙)의 제의로 나이 70세 이상인 노친을 모시고 있는 재상들이 참여하여 봉노계를 결성하였다. 의령남씨로는 참판 남이신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의견을 모아 경수연을 베풀기로 결정하였다. 이 일이 선조에게 알려져 왕은 팔도에 특명을 내려 잔치에 드는 비용을 돕게 하고 삼청동 주3에서 모이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605년에 그린 원화는 병화(兵火)로 유실되어 전하지 않고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655년(효종 6)에 다시 제작되었다. 이 화첩의 서문을 쓴 이경석(李景奭)에 따르면 당시 수연에 채대부인의 집사자제(執事子弟)로 참석하였던 이문헌(李文藼)이 화첩의 유실을 안타까워하여 아들 이관(李灌)에게 화수(畵手)를 데려다 다시 그림으로 그리고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일을 맡겼다고 한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는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화면 구성과 사실감 넘치는 표현을 구사하였다.

「영묘조구궐진작도」는 궁중에서 왕에게 올리는 소규모의 연례인 진작례의 광경을 담고 있다. 국초인 1407년(태종 7) 12월 16일 태종이 당시 태상왕이던 태조가 장수하심을 기뻐하며 덕수궁에서 소작례가 있었는데, 주4에 충실하였던 영조는 같은 정해년인 1767년(영조 43) 12월 16일에 태조가 정도 때 창건한 경복궁 구지(舊址)에서 왕세손과 대신(大臣), 주5 등에게 소작을 베푼 행사를 그린 것이다.

이 의례에 참석했던 의령남씨로는 좌참찬 남태회가 있다. 그림을 보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둥근 공간 안에 차일과 근정전 구기(舊基)가 비교적 크게 부각되었다. 이 그림의 산수와 인물 양식이 「태조망우령가행도」와 유사하다. 따라서 「태조망우령가행도」와 「영묘조구궐진작도」는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의의 및 평가

의령남씨 가문의 인물들이 조선 왕실과 관련한 특정 행사에 참여했던 사실을 관련 기록과 그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화책이다. 후대 중모본이 섞여 있으나 선대의 자취를 그대로 전하고 있어 원래 그림의 모습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능숙한 솜씨의 화원이 정성을 들여 제작한 듯 다섯 건의 그림 모두 수준이 높다. 또한 일괄로 현전하고 있다는 점과 현존하는 유사한 사례의 작품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2016년 4월 7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홍익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논문

박정혜, 「조선시대 의령남씨 가전화첩」(『미술사연구』 2, 미술사연구회, 1988)
안휘준, 「16세기 조선왕조의 회화와 단선점준(短線點皴)」(『진단학보』 46 · 47, 진단학회, 1979)
주석
주1

임금이 죽기 전에 마련해 놓는 장지.

주2

예식을 갖추고 임금이 신하를 접견하던 자리.

주3

관아의 건물.

주4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대의 사업을 잘 발전시켜 나가는 것.

주5

임금의 장인.

집필자
신선영(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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