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축갑회도」는 1686년(숙종 12) 충청북도 청주 향반들이 갑회 모임을 갖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그림이다. 중앙에서 성립된 회화 양식이 지방으로 저변 확대를 이루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주는 자료로, 함께 남겨진 죽림갑계 문서의 내용이 그림에 충실히 반영되어 있어 17세기 충청북도 향반들의 계 문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1983년 11월 30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생들의 친목 모임을 ‘갑회(甲會)’, ‘ 갑계(甲契)’라고 하였고, 갑회에서 특별한 만남이나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그 일환으로 갑회도를 제작하여 나누어 갖는 것이 관례였다. 「을축갑회도」 역시 갑회 모임을 갖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그림이다.
을축년 1625년(인조 3)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난 11명의 문인들이 36세 되던 1660(현종 1)에 친목 모임인 ‘을축갑계’를 만들었고, 이듬해인 1661년 청주 인근 야양산(爺孃山) 부도암(浮屠菴)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이 때에는 11인이 모두 참여하였으나 계회도는 제작되지 않았다.
계회도가 제작된 것은 이들이 62세가 되던 해인 1686년(숙종 12)에 이후직(李後稷, 16241698), 변숙(卞潚, 16251695), 지성구(池聖龜, 16251702), 신영식(申永植, 16251694), 왕린(王潾, 1625~?), 민광도(閔光道, 16251713), 민광시(閔光時, 16261696) 등 7명이 청주 보살사에서 갑계 모임을 가졌을 때였다. 보살사의 화승 의인(義仁)이 회원들에게 갑회에 참석한 자들의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결국 갑회도 제작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모두 9점의 갑회도를 제작하여 계원 7인과 하계의 계원 2인에게 각각 한 점씩 나누어 가졌다.
「을축갑회도」는 2점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하나는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이며, 다른 하나가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의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이다. 후자는 관련 문서인 필사본 「죽림갑계기(竹林甲契記)」가 함께 전한다. 두 그림은 인물 구성에서뿐 아니라 시점과 투시법, 세부 묘사의 화법과 필치에서도 차이가 있어, 제작 시기나 화가가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 「을축갑회도」는 화면 상단에 "乙丑甲會圖(을축갑회도)"라고 쓴 전서체 제목과 중단에 그림, 하단에 좌목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각 안에 7인의 계원과 그 좌우측에 하계 계원 2인이 좌정해 있는 모습을 그렸다. 지붕에는 별도의 칸을 구획하여 전서체로 "보살사암(菩薩寺菴)"이라는 글을 써넣어 이곳이 보살사의 암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각 인물들의 바로 아래에 작은 구획을 마련하고 묵서로 해당 인물의 자(字)를 써서, 그림 속 인물이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청주고인쇄박물관 본에는 서울역사박물관 본과 달리 18인의 자제들이 그려지지 않았다. 당시 계회에 참석했던 변숙이 「을축갑회도」에 대해 쓴 「갑회도설(甲會圖說)」에 따라서 자제 18인을 그린 서울역사박물관본이 1686년 화승 의인이 그린 것이고 청주고인쇄박물관본은 1686년 이후 다른 화가에 의해서 새로이 기로회도 형식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앙에서 지방으로 전해진 계회도는 지역 양반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계회도의 화풍은 지방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계회도의 단순한 모방에서 시작하여 계회도 제작의 저변 확대로 이어졌던 것이다. 「을축갑회도」는 중앙에서 성립된 회화 양식이 지방으로 전래되고 저변 확대를 이루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입증해 주는 자료이다. 또 함께 남겨진 죽림갑계 문서의 내용이 그림에 충실히 반영되어 있어 17세기 충청북도 향반들의 계 문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1983년 11월 30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