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최동률의 10세손 재교(在敎)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소락(金紹洛)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최동술(崔東述)과 최재교의 발문이 있다.
목판본. 2권 1책. 국립중앙도서관·한국국학진흥원·영남대학교 도서관·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 부(賦) 2편, 시 4수, 설(說) 2편, 논(論) 1편, 권2에 부록으로 행장초(行狀抄) 1편, 가전(家傳) 1편, 갈명(碣銘) 1편, 지명(誌銘) 1편, 만(輓) 1편, 한강문인록초(寒岡門人錄抄) 1편, 초당일기(草堂日記) 1편, 동방록(同榜錄) 1편, 다천정기(茶川亭記) 2편, 축문(祝文) 2편 등이 실려 있다.
부 가운데 「곤내위복부(困乃爲福賦)」는 큰 공(功)을 이루려면 인내가 필요하고, 그 곤궁함이 지나면 다시 복이 돌아온다는 것을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예로써 읊었으며, 「읍선부(挹仙賦)」는 귀향하여 벼슬하지 않고 인간의 시비와 단절하여 초연하게 살겠다는 뜻을 읊은 것이다.
시는 몇 수 되지 않지만 시상이 뛰어나게 맑고 시경(詩景)의 묘사 또한 절묘하다. 특히 「소유정판상운(小有亭板上韻)」에 차운한 2수의 시는 솔·돌·바람·장강(長江)·달·술·물새·어주(漁舟) 등을 인용하여 그 진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설 가운데 「득인여인설(得仁如仁說)」에서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각각 아버지의 명령의 존엄함과 천륜의 중함을 알아서 어기지 않았지만 모두가 사심을 버리고 행하였기에 인(仁)이라 할 수 있고, 관중(管仲)은 제후를 규합하여 병거(兵車)를 쓰지 않고 천리(天理)를 따라서 살상 없이 공을 세웠지만 인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을 맹자(孟子)와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기술하였다.
논에서는 「남유여유(男唯女喩)」에 대해 남자는 양(陽)이라 유속(唯速)하고 여자는 음(陰)이라 유완(喩緩)하므로 강유(剛柔)에 따라 강속(剛速)·유완(柔緩)의 원리가 있다는 내용을 논하였다. 부록 가운데 「문인록」은 최동률이 정구(鄭逑)의 문하생임을 입증하는 자료이며, 일기는 최동률의 강록(講錄)을 기록해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