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건물. 1974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증손인 이서(李緖)가 1507년(중종 2) 이과(李顆)의 옥사에 연루되어 전라도 창평(昌平)에 유배되었다가 1520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귀경하지 않고 이곳에 남아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몽한각은 1803년(순조 3) 그의 후손인 담양부사 이동야(李東野)와 창평현령 이훈휘(李薰徽) 등이 이 지방에서 관직을 지내면서 이서를 추모하고자 현재의 규모로 조영하였다 한다.
‘몽한각’이라는 이름은 이서가 유배 시절 지은 시 구절 “斗縣雲山壯 寒窓歲月多 分明今夜夢 飛渡漢江波(두현운산장 한창세월다 분명금야몽 비도한강파)”에서 ‘夢’자와 ‘漢’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몽한각은 1916년과 1979년에 기와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솟을대문은 1966년에 조영한 것이다. 경내에는 이훈휘의 「몽한각 상량문」과 기우만(奇宇萬)의 글이 있는 신도비가 있으며, 이서의 유서(遺書)가 윤용구(尹用求)의 친필로 조각되어 있다.
대지는 상 · 하단 영역으로 구분되었는데, 상단에는 두 단의 높은 축대 위에 남서향의 몽한각이 배치되고, 하단에는 넓은 마당과 솟을대문을 몽한각에 일축선상으로 배치하였다.
중앙에는 3칸통의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1칸통의 방을 두어 정면 5칸, 측면 2칸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전후좌우의 처마에 마루를 설치하였고, 좌우 측면과 정면 협칸에만 퇴칸을 설치해서 마치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인 듯한 구성을 하고 있다.
외벌대로 낮은 기단을 쌓아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처마에 설치한 퇴주와 대청의 기둥은 원기둥이며, 다른 기둥은 방주를 사용했다. 퇴칸의 모서리에는 기둥을 설치하지 않는 대신 바깥쪽에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세운 특징이 있다. 공포는 정면에만 설치했는데 화려하게 초각을 한 이익공이며, 기둥 사이에는 원형의 화반을 설치했다. 창호는 전면은 띠살문, 배면은 판문(板門)으로 하였고, 대청의 문은 4분합 들어열개로 서까래에 설치한 걸쇠에 매달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