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8,291㎡. 남해신당제(南海神堂祭)는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3대 해신당제(海神堂祭)의 하나로, 고려 때 전라남도에서는 가장 먼저 국제(國祭)에 올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남해신사(南海神祠)가 남쪽 45리 지점에 있고, 제의식에서 중사(中祀)로 기록되어 있다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에는 남해신당은 1098년(고려 현종 19)에 비로소 남해신을 제의식에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전라남도에서 통일신라 때 국제터는 영암 월출산(月出山)과 완도 청해진(淸海鎭)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영암의 남해포(南海浦), 지리산(智異山), 무등산(無等山), 나주 금성산(錦城山)이 있었다.
영암의 남해신당터는 남한 유일의 제터가 남아 있는 곳으로 이 지역에서는 남해신단(터) 혹은 남해신사(터)라고도 부른다. 남해당지는 해방 후까지도 여객선이 드나들던 곳과 가까운 구릉에 있는데, 소나무숲이 우거져 있어 바다에서 포구로 들어오는 배들의 항로 표지 구실을 하였다.
현재 당터는 소나무 몇 그루가 남아 있고 무성한 잡풀로 덮여 있어 명확한 흔적을 찾기 힘들다. 개략적인 당지의 구성을 현지인의 증언과 조사보고서(1986) 등을 통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
당터는 3단계로 층을 두었는데, 북쪽 상단에 2기의 지석묘가 자리잡고 있고, 중단 중앙에는 3칸 제당이 있었으며, 남쪽 하단에는 대칭으로 4칸의 문간채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각 단의 높이는 2m 가량이고 서쪽 담장 밖으로 제각지기의 집이 있었으며 동쪽 담장에도 문이 있었다고 한다.
제당은 단청이 되어 있으며 당 안에 닫집이 있었고 서까래나 용마루는 모두 용각(龍刻)과 용비늘 단청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대문과 제관방 및 제당 사이에는 보도가 깔려 있으며 장식된 난간석(欄干石)도 있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보면, 남해당의 건물은 매우 화려하고 장대하였으리라 짐작되는데,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헐려 인근 마을의 동각(洞閣) 개수에 쓰였다고 한다.
또 이곳은 제터라 하마(下馬) 경계 표지석이 있었고, 제관들이 머무르던 역촌이 있었다고 한다. 당터에서 50m 떨어진 서쪽 언덕 아래에는 제사용 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