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이 대동계(大同禊)를 조직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고변 내용이 『 선조실록』보다 서인 세력에 의해 수정된 『 선조수정실록』에 자세히 실려 있다. 즉, 1589년(선조 22) 10월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 군수 이축(李軸), 신천 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은 변서(變書)를 올려 ‘전(前) 수찬(修撰) 정여립이 모반한다.’고 하였다.
정여립은 왕의 견책을 자주 입고 호남 금구현(金溝縣)으로 달아나서 전주에 거주하기도 하였고, 김제 · 진안의 별장을 왕래하며 강학을 가탁하여 무뢰배를 불러 모았는데, 무사와 승도들도 섞여 있었다. 또 해서(海西) 지역에서 임꺽정의 난이 있었음을 보고 황해도사(黃海都事)가 되기를 청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안악 사람 변숭복(邊崇福) · 박연령(朴延齡), 해주 사람 지함두(池涵斗) 등과 몰래 서로 교결하여 사람들을 수백 명 불러 모았다.
그는 잡술에 두루 통하여 감여(堪輿)와 성기(星紀) 등에 관한 서적을 중국에서 사다가 무리들과 강설(講說)하였고, 국가에 장차 왜변이 있을 것을 알고 때를 타고 일어나려고 전주 · 금구 · 태인 등 이웃 고을의 여러 무사와 공천 · 사천 중의 장용한 사람 등과 대동계를 만들었다.
매월 15일에 한곳에 모여 활쏘기를 겨루고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즐기면서 "활쏘기란 육예(六藝) 중의 하나이니, 남자로서 마땅히 학습해야 한다."고 하였다. 문인은 모두 활쏘기 익히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서 모두들 말하기를, “우리 동방의 선유(先儒)들은 예학만 알 뿐이었는데, 사예(射藝)를 가르치는 것에 이르러서는 오직 우리 선생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1587년(선조 20) 왜변에 많은 읍이 군사를 조발(調發)하였는데, 전주 부윤 남언경(南彦經)이 당황하여 조처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여립을 청하여 군대를 나누게 하니, 사양하지 않고 군병을 모았는데, 장령(將領)들은 모두 대동계에 들어 있는 친밀한 무사를 썼다.
적이 물러가고 군사를 해산하자 정여립이 장령에게 말하기를, “훗날 혹시 변고가 있으면 너희들은 각각 부하들을 거느리고 일시에 와서 기다리라.” 하고, 그 군부(軍簿) 1건은 자신이 가지고 갔다.
남언경이 감탄하여 "이 사람은 유술(儒術)뿐만이 아니니, 그 재능을 따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고변이 조정에 접수되자 대동계는 역모 준비를 위한 조직으로 간주되었고, 정여립은 도망하다가 자살하였으며, 나머지 일당들은 잡혀 죽었다. 이 사건은 급기야 기축옥사(己丑獄事)로 비화되었다. 학계에서는 정여립의 모반이 서인 세력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