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만록(東槎漫錄)』은 박대양이 1884년(고종 21)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4개월간의 기록이다. 사신 일행은 정사(正使) 서상우(徐相雨, 18311903), 부사 목인덕(穆麟德, 18481901), 종사관(從事官) 박대양 등이었다. 사행의 목적은 갑신정변이 개화당의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자, 수구당에서 이에 대한 뒷수습을 위하여 파견한 것이다.
1913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간행한 『해행총재』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나,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발간한 『해행총재』에는 수록, 번역되었다.
박대양(朴戴陽, 18481888)의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부친은 박제순(朴齊淳, 18131886)이며, 족숙(族叔) 박제성(朴齊晟)은 당시 제물포 수령이었다. 그는 유학의 신분으로 종사관에 추천되어 처음 관직에 나갔다.
애초 이 사행은 일본의 배후 조종에 의하여 시도되었다가 실패한 갑신정변(甲申政變)에 따른 중요 문제를 담판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그러나 사행이 출발하기도 전에 조·일간에 한성조약(漢城條約)이 체결되었다. 따라서 이 사행은 양국간의 정치적 의미보다 외교적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전권대신(全權大臣)’을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고쳤다. 이 사행의 임무는, 첫째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 등의 인도 요구, 둘째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조선 생도들의 소환, 셋째 울릉도의 목재 대금 지불 요구 등이었다.
이 세 가지 사항은 모두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가 1882년(고종 19) 사행 때 체결한 것인 만큼 개화당(開化黨)과 수구당(守舊黨)의 정치 싸움의 연장이었다. 이 사행에서 이들은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정치범의 체포 인도나 생도의 본국 소환도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목재의 대금 지불 문제도 외무성에 공문을 전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 책의 내용은 「일기」·「동사기속(東槎記俗)」·「동사만영(東槎漫詠)」으로 나뉘어 있다.
「일기」는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1884년(고종 21) 10월 17일의 기록으로부터 봉명사신(奉命使臣) 서상우의 종사관으로 부임하여 일본에 파견된 뒤, 돌아와 복명한 1885년(고종 22) 2월 20일까지의 일을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내용이나 양에 있어 소략한 감이 있으며, 빠진 날도 많이 보인다. 그것은 일본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으려 한 데서 기인한 듯하다.
「동사기속」은 일본인의 습관, 법률 등 풍속을 기록한 것이고 「동사만영」은 일본에서 저자가 지은 시 12편인데, 모두가 나라의 어지러움을 걱정한 내용들이다.
19세기 말엽 갑신정변이 발생할 시기의 조선과 일본의 관계 및 당시 일본의 정세를 살피는데 참고자료가 된다. 특히 당시 집권당인 수구당의 시국관과 세계정세 인식을 검토하는데에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