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신홍기(申鴻基)가 편집·간행하였다. 서문과 발문은 없다.
10권 5책. 목활자본. 규장각 도서와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 시, 권2·3에 소(疏)·차(箚), 권4·5에 계(啓)·공함(公緘)·정문(呈文), 권6에 서(書), 권7에 잡저, 권8에 서(序)·기(記)·발(跋)·잠(箴)·표전(表箋)·애사·고사(告辭)·제문·묘지·행장, 권9·10은 부록으로 연보·행장·묘갈명·묘지·제문·만장(輓章) 등이 실려 있다.
시는 서정시가 많으며, 장현광(張顯光)의 시를 차운한 시와 유성룡(柳成龍)에 대한 만시(輓詩) 등이 있다.
소의 「진시폐십조소(陳時弊十條疏)」는 인조에게 올린 소이다. 신달도는 시정의 폐단을 지적하고 용현량(用賢良)·택수재(擇守宰)·수인심(收人心)·여풍속(厲風俗)·납간쟁(納諫諍)·결옹폐(決壅蔽)·신서옥(愼庶獄)·생용관(省冗官)·균전부(均田賦)·수군정(修軍政)의 10개 조항에 걸친 개선책을 논하고 있다.
「구퇴후진소회소(寇退後陳所懷疏)」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금군(金軍)이 물러간 후 올린 소이다. 200년 예의의 나라로서 금과의 화약(和約)은 국가의 막대한 수치라고 지적하며, 앞으로는 병력을 증강하고 군량을 비축하며 군신간에 한 마음으로 협력해 화를 사전에 방비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계 중에는 주화파 최명길(崔鳴吉)에게 법에 의해 참형을 내리기를 청하는 장계(狀啓)가 있다. 「가도봉사시견문계(椵島奉使時見聞啓)」는 가도에 접반사(接伴使)로 갔다가 돌아와서 1627년 3월 24일부터 5월 8일까지의 보고들은 일들을 조정에 보고한 장계이다.
조목(趙穆)·장현광·정경세(鄭經世)에게 올린 서에는 의기설(義氣說)과 학문적인 논설, 시사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잡저의 「남산문목(南山問目)」은 『역학도설(易學圖說)』을 비롯하여 이기설(理氣說)·사칠론(四七論)·예설(禮說) 등에 관한 사제간의 문답을 기록한 것이다. 「고유제생문(告諭諸生文)」은 저자가 전주판관으로 있을 때 유생들에게 알린 것으로 주희(朱熹)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규약을 모체로 하여 향약(鄕約) 12조목과 학규(學規) 20조목을 지어 학문 발전에 힘쓰도록 한 것이다.
「강도일록(江都日錄)」은 1627년 정묘호란 당시 1월 17일부터 3월 23일까지 인조의 호가(扈駕)가 강화도로 옮겨졌을 때의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