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에 미국 위스콘신대학 인류학 연구실의 동아시아지역 연구조사계획에 따라 샘플(Sample,L.L.) · 차드(Chard,C.S.) · 모어(Mohr,A.) 등에 의해 조사되었다. 그 뒤 1964년에는 임효재(任孝宰)에 의해 조사되었다. 유적은 주문진 남쪽 3㎞ 지점의 구 동해북부선과 도로가 교차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유물포함층의 크기는 100×50㎡이다. 여기서 채집된 유물은 다량의 즐문토기편과 마제석부 1점, 석영제인기(石英製刃器) 2점, 사암제인기(砂巖製刃器) 2점, 골편 1점 등이 있다.
출토된 토기편의 태토(胎土)는 점토질에 석영립이 포함된 것으로 간혹 활석 · 석면 · 운모가 섞인 것도 있다. 색깔은 적갈색 · 황갈색 · 흑갈색이다. 기형(器形)은 구연부(口緣部)에서는 내반과 외반이 있으나 대부분 직립으로 처리되었으며, 저부는 모두 환저(丸底) 또는 첨저(尖底)이고, 평저(平底)도 있다.
문양은 구연부에는 평행집단사선문 · 점렬문(點列文) 등이 있고, 동체부에 주로 횡주어골문(橫走魚骨文) · 사격자문(斜格子文)이 나타난다. 그 밖에 반절죽관문(半截竹管文) · 조형문(爪形文) · 종선열문 · 평행선문 · 유엽형각선문(柳葉形刻線文) · 조대문(組帶文) 및 불규칙한 침선문(沈線文) 등도 있다.
이 유적에서는 이러한 문양토기편 외에 무문양토기편도 출토되었다. 1962년의 조사에서 채집된 343편 중 63편인 18%가 무문양이고, 1964년의 조사보고에도 17.5%의 무문토기편이 포함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영진리 토기는 한반도 중서부지방이나 남부해안지역과 유사한 점이 보인다. 그러나 기형이나 시문법(施文法), 크기 등으로 볼 때, 더욱 가까운 관계를 가지는 것은 한강 하류지역인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