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5년(헌종 1) 김상흠의 아들 김제오(金悌五)가 편집·간행하였다. 서문은 김헌기(金憲基)가 썼는데, 성리학의 연원을 처음부터 자세히 설명하고, 저자의 성리학적 깊이와 알기 쉽게 풀어놓은 공을 치하하였다.
2권 1책. 목활자본. 장서각 도서에 있다.
권1에 시 40수, 서(書) 7편, 권2에 잡저 5편과 부록으로 행장·묘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대부분이 기행시이다. 남아로서의 웅혼한 기상과 경륜을 표현한 작품이 많다.
「제벽(題壁)」은 3수이다. 유와 무의 대립을 깨뜨린 곳에서 존재의 묘리를 얻는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말고 다만 이치에 합당한가 않은가만을 살피라는 좌우명 형식의 2구시도 있다. 「과장익일여왕민중휴주등남산(科場翌日與王敏仲携酒登南山)」은 과거시험을 치른 다음날 술을 들고 남산에 올라가 권문세가의 부귀영화가 무상함과 자신의 불우함을 읊은 것이다.
「지망빈현구호(至望賓峴口號)」에서는 천하를 위해 큰일을 하고자 하는 남자의 웅지는 어떠한 괴로움도 꺼려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남아로서의 대단한 자부심을 강조하였다. 이 시에는 백성의 삶에 대한 자상한 관심도 노출되어 있다. 「제천후선각(堤川候仙閣)」에서는 논에 물을 대어 농사짓는 일을 의림지(義林池)에 의존하니 백성을 살리는 큰 혜택이 백 년 동안 깊다고 하였다.
「강경진봉대(江景津烽臺)」에서는 봉화 그친 평화로운 세상에 많은 인물이 나서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를 희망하였다. 「송파점견청인공덕비(松坡店見淸人功德碑)」에서는 청나라를 칭송하는 비문에 대해 이것이 백성을 살리고자 하는 계책이겠으나 길이 영웅의 마음을 못마땅하게 만든다고 애통해 하였다.
서의 「대나산선생문이울산문목(對蘿山先生問李蔚山問目)」이나 「답김가지(答金可之)」 6편, 잡저 「성리기원편(性理氣原篇)」·「성리기후편(性理氣後篇)」 등은 모두 성리학에 대한 논설이다. 「만록(漫錄)」은 학문과 수양에 관한 여러 단상들을 적은 것이고, 「논시무(論時務)」는 당시 정치의 개선 사항을 17개 항목으로 지적한 것으로, 인재 양성과 선발·토지·신분·병무·국방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