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탄부(坦夫), 호는 급암(及庵). 찬성사 민적(閔頔)의 아들이며, 정승 김륜(金倫)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능과 도량이 있었다.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산원·별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예문춘추관수찬(藝文春秋館修撰)을 거쳐 예문응교(藝文應敎)·성균대사성이 되고, 1344년(충혜왕 5)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한 뒤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던 공으로 충정왕이 즉위한 1348년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가 되었으며, 그 뒤 수성병의협찬공신(輸誠秉義協贊功臣)의 호가 주어졌고, 찬성사상의회의도감사(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아하며 친척들과 화목하고 교유를 잘 하였으며, 관직에 있을 때도 일을 처리하는 데 모나지 않았다. 시서를 즐기고 학문에 열중하여 당시 이제현(李齊賢)·정자후(鄭子厚) 등과 함께 문명(文名)이 높았다. 『동문선(東文選)』에 민사평의 시 9수가 전한다. 저서로는 『급암집(及菴集)』이 있으며, 1981년 보물 급암선생 시집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