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봉래(鳳來).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박준원(朴準源)이고, 아버지는 호조판서 박종보(朴宗輔)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德水李氏)로 군수 이술모(李述模)의 딸이다. 이조판서 문숙공 박종경(朴宗慶)에게 입양되었으며, 종조부인 박윤원(朴胤源)의 문인이다.
1810년(순조 10)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1817년(순조 1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가 되었다.
그 뒤 홍문관부교리·이조참의·대사성·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 등을 거쳐, 1835년(헌종 1) 공조판서에 승진하였다. 이어 예조·형조·이조·병조 등 5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지경연(知經筵)·도총관·함경도관찰사·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좌참찬 등을 두루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벼슬이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1830년(순조 30) 익종(翼宗)의 빈궁(殯宮)에 불이 났을 때 단신으로 불속에 뛰어들어 진화하였으므로 모두 그 충성심을 칭찬하였다. 그 뒤 판의금부사로 있을 때 간신 김필(金弼)의 배소를 가까운 곳에 정할 것을 건의하였다가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양주의 돈암구사(敦巖舊舍)에 돌아가 산수를 소요하면서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으나 1847년 병조판서에 재기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