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성익(聖翊), 호는 수와(守窩). 백채후(白采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백일영(白日永)이고, 아버지는 백선양(白善養)이다. 어머니는 노현진(盧玄軫)의 딸이다.
1786년(정조 10)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고, 이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좌랑(佐郎)을 거쳐 1811년(순조 11) 평안도도사가 되었다. 이 때 심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동태가 심상하지 않다고 판단, 감찰사에게 구휼책을 세울 것을 요청하였다.
얼마 후 백경해는 정주(定州) 집에 있다가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형 백경한(白慶翰)에게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게 하고 평양에 돌아갔다. 그러나 운산군수(雲山郡守)에 임명되자 밤을 이용, 임지에 이르러 군민을 효유(曉諭)하고 영변(寧邊)과 연락해 의군(義軍: 의로운 군사)을 규합하던 중 형 백경한의 순절 소식을 들었다.
이에 더욱 분개, 대군을 재촉해 정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형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의복을 갖추어 장사지내고 죽을 때까지 정주성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뒤 태천현감(泰川縣監)이 되어 난리로 피폐된 민생을 진제(賑濟: 재난으로 입은 피해자들을 구제함)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무고를 입어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기용되었다. 그 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저서로는 『수와집(守窩集)』 3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