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은 일제강점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홍길동전」·「천변풍경」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다. 1909년에 태어나 1986년에 사망했다. 청소년기부터 시와 콩트를 발표하며 문학소년의 길을 걷다가 일본에 잠시 유학했고 1930년부터 소설가로 활동했다.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웠고, ‘기교파’ 또는 ‘예술파’로 불리는 구인회 활동에 참여했다.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조선문학건설본부 임원을 역임했고, 문우였던 이태준·안회남과 함께 한국전쟁에도 참여했다. 1956년 남로당계 숙청으로 작품활동을 중단했다가 이후 작가로 복귀했다.
1909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7세 무렵 학교를 휴학하고 외국문학 작품을 탐독했다. 춘원 이광수와 백화 양건식을 사사하였고 학창시절에는 주로 「달맞이」, 「누님」 등의 시와 「최후의 모욕」 등의 콩트를 발표하였다.
영문학에 뜻을 두고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호세이[法政]대학 예과에 잠시 적을 두었으나 이듬해에 중퇴하였다. 이 시기의 일본 유학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1933년 발표한 「반년 간」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1930년 소설 「수염」, 「적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 헤밍웨이, 맨스필드 등 영미 작가들의 최신 문학 작품들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워 ‘기교파’ 또는 ‘예술파’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1934년 그의 대표작이자 ‘소설가 주인공 소설’의 대명사가 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다. 또한 「딱한 사람들」, 「애욕」, 「거리」 등 식민지 도시인의 심리와 인간에 대한 연민을 세련되고 실험적인 문장에 담아낸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특히 「애욕」과 「제비」, 「이상의 비련」 등은 절친한 벗이자 문학적 동지인 작가 이상을 모델로 한 것이다.
박태원은 1936년에 다수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창작한다. 구인회의 동인지인 『시와 소설』에 마침표 없이 한 개의 문장으로만 이루어진 소설 「방란장 주인」을 발표하는가 하면, 잡지 『조광』에 「천변풍경」을 연재하여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큰 줄기의 서사 없이 삽화들의 나열로 구성된 이 작품을 두고 임화, 최재서 등 여러 평론가들이 장편소설, 세태소설 논의를 이어갔다.
이후 카페 여급, 도시빈민 등 도시의 주변적인 삶을 조명한 「성탄제」, 「골목안」을 비롯하여, 사이비 종교인 백백교의 집단 살인 사건을 소설화한 『우맹』(후에 『금은탑』으로 개제), 『명랑한 전망』, 『여인성장』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다.
1940년 돈암동에 집을 지어 이사한 뒤에 겪은 일들을 토대로 한 소설 「음우」, 「투도」, 「채가」를 발표하였다. 이는 일제 말기 작가로서의 내면의 갈등을 생생하게 고백하고 있어 ‘자화상 3부작’으로 불린다. 이 시기 중국 문학과 역사물 번역도 활발하게 이어나가 『신역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 『지나소설집』 등을 번역하였다.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 집행위원, 조선문학건설본부 소설부 중앙위원회 조직임원으로 선정되었고, 의열단장 김원봉의 활약상을 그린 『약산과 의열단』, 장편소설 『홍길동전』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 역사소설 집필에도 열중하여 「춘보」, 「태평성대」, 「군상」 등을 저술하였다.
1950년 문우였던 이태준, 안회남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여하였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평양 문학대학 교수, 국립고전 예술극장 전속 작가로 활동하며 『조선창극집』, 『정수동 일화집』 등을 저술하였다. 1956년 남로당계 숙청으로 작품활동이 중단되었다가 이후 작가로 복귀하여 『삼국연의』, 『임진조국전쟁』 등을 저술하였다.
북한에서의 저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와 『갑오농민전쟁』이 있다. 1950년대에 작품 구상과 자료 수집에 들어가 1964년 저술하기 시작하였으나 실명과 전신불수를 겪으면서 20여년 뒤인 1986년 사후에 부인 권영희와의 공저로 완결되었다. 1979년 북한에서 국가훈장 1급을 받았다.
50여년의 세월 동안 소설뿐만 아니라 시, 수필, 평론, 외국문학 번역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발표하여 남한에서는 도시서사의 대표자로, 북한에서는 역사소설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에서 오래 생활하였기 때문에 경알이(서울말)를 문장으로 실현하였다.
2004년 구보학회가 창립되었고, 2009년 박태원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및 전시회 낭독회 등 문화행사가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