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흥선대원군은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함락한 직후 강인학과 왕민렬 등을 부상(負商) 접장과 도반수에 임명하여 기존의 군사력 외에 부상의 물리력을 활용하여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부상들은 일시적으로 군대에 부속되어 주로 양곡 수송을 담당하였다.
프랑스군이 조선에서 물러간 이후 정부에서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부상 우두머리인 왕민렬, 강인학, 전득룡, 양천길 등을 그해 10월에 포상하고 비변사의 군공자 명단에 이들의 이름을 올렸다. 이후 1876년(고종 13) 개항 당시의 기록에 부상청(負商廳) 도공원(都公員)으로 김성애(金聖愛)를 임명하였다는 단편적인 기록이 보인다.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보부상들은 1879년(고종 16)에 5종의 몰품에 대한 전매권을 한성부에서 허가받았다.
1881년(고종 18)에 보부청이 설립되어 고종에게 8도 도임방(都任房)의 설치를 허가받고 무위소에서 비용을 받아 서울 중부동에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도임방에는 8도임방 도존위, 부존위, 삼존위, 도접장을, 그 아래에는 7명의 본방공원, 8명의 문서공원, 8명의 집사 등을 두었다.
후일 보부상 전담 기구는 1883년(고종 20)에 군국기무아문 관할로 혜상공국(惠商公局)을, 1885년에 내무부 산하 기구로 상리국(商理局)을,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에 의정부 산하에 상무사(商務社)를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