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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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근대사
제도
개항 전후 시기에 설치된 보부상 전담 기구.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1881년(고종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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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보부청은 개항 전후 시기에 설치된 보부상 전담 기구이다. 1876년에는 부상청으로 있었던 것이 1881년에는 부상청과 보부청으로 나누어졌다. 보부상 집단은 병인양요 이후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세력이 성장하였고 그 과정에서 기구도 강화되었다.

정의
개항 전후 시기에 설치된 보부상 전담 기구.
경위

1866년(고종 3) 병인양요흥선대원군은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함락한 직후 강인학과 왕민렬 등을 부상(負商) 접장과 도반수에 임명하여 기존의 군사력 외에 부상의 물리력을 활용하여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부상들은 일시적으로 군대에 부속되어 주로 양곡 수송을 담당하였다.

프랑스군이 조선에서 물러간 이후 정부에서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부상 우두머리인 왕민렬, 강인학, 전득룡, 양천길 등을 그해 10월에 포상하고 비변사의 군공자 명단에 이들의 이름을 올렸다. 이후 1876년(고종 13) 개항 당시의 기록에 부상청(負商廳) 도공원(都公員)으로 김성애(金聖愛)를 임명하였다는 단편적인 기록이 보인다.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보부상들은 1879년(고종 16)에 5종의 몰품에 대한 전매권을 한성부에서 허가받았다.

내용

1881년(고종 18)에 보부청이 설립되어 고종에게 8도 도임방(都任房)의 설치를 허가받고 무위소에서 비용을 받아 서울 중부동에 사무소를 설치하였다. 도임방에는 8도임방 도존위, 부존위, 삼존위, 도접장을, 그 아래에는 7명의 본방공원, 8명의 문서공원, 8명의 집사 등을 두었다.

후일 보부상 전담 기구는 1883년(고종 20)에 군국기무아문 관할로 혜상공국(惠商公局)을, 1885년에 내무부 산하 기구로 상리국(商理局)을,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에 의정부 산하에 상무사(商務社)를 설치하였다.

의의 및 평가

고종 즉위 당시 대원군은 보부상 단체의 세력을 인식하여 '상공국(商工局)'을 설치한 후 스스로 1당상이 되고, 측근인 이경하를 2당상, 이종건을 3당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병인양요 종결 이후 서울에 '보부청'을 설치하고 큰 아들 이재면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고 전국의 보부상을 모두 소속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전국의 보상과 부상을 통합하여 관할한 것은 1883년 4월 이후 삼군부(三軍府)에 이속됨으로써 이루어진다.

참고문헌

원전

『공원행판관차첩(公員行判官差帖)』
『보상청절목(栿商廳節目)』
『순무영등록(巡撫營謄錄)』
『판하경기도도소사적(判下京畿道都所事蹟)』
『판하상리국절목(判下商理局節目』
『한성부완문(漢城府完文)』

단행본

조재곤, 『근대격변기의 상인, 보부상』(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박원선, 『부보상-한국상법사상의 행상제도연구』(한국연구원, 1965)
信夫純平, 『韓半島』(東京堂書店, 1901)
日戶天嘨, 『負褓商團眞相』(1907)
집필자
조재곤(서강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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