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은 복위부묘도감(復位祔廟都監)이다. 1698년(숙종 24) 10월에 설치되어 총책임관인 도제조(都提調)에는 당시의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임명되었다. 이때 단종과 왕비의 묘를 능으로 조성하기 위한 봉릉도감(封陵都監)이 병설되었는데, 도제조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임명되었다.
이 두 도감은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위호를 회복시키고 그 신주를 종묘 영녕전(永寧殿)에 부묘함과 동시에 노산군묘와 부인 송씨(宋氏)의 묘를 각각 장릉(莊陵)과 사릉(思陵)으로 조성하기 위한 의전 담당기구였다.
단종의 억울한 사정은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으나 공식적으로 복위 문제가 거론된 것은 숙종 초 윤휴(尹鑴)에 의해서였다. 그 뒤 1698년 9월신규(申奎)의 상소가 있자, 10월 초에 중신들의 회의를 거쳐 24일 왕의 특명으로 복위가 결정되었다.
26일 도감을 설치했고, 11월 6일 중신회의에서 단종과 왕비의 시호를 각각 순정안장경순대왕(純定安莊景順大王)과 정순단량제경왕후(定順端良齊敬王后)로, 묘호(廟號)를 단종, 능호를 장릉·사릉으로 결정하였다.
12월 25일창경궁시민당(時敏堂)에서 왕의 친림하에 신주를 조성해 27일 영녕전에 부묘함으로써 복위의 전례가 완성되었다. 다음 해 정월 초하루에 도감 관원들에 대한 포상이 내려지고 축하연이 베풀어졌다.
단종복위부묘도감은 그 의궤(儀軌)가 전하지 않아 자세한 편제와 행사 내용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대체로 통상적인 부묘도감의 예에 따라 행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도제조(都提調)·제조·도청(都廳)·낭청·감조관 등이 임명되고, 다시 도청·1방·2방·3방·별공작(別工作) 등으로 편성되어 신주의 조성, 옥책·금보의 제작, 책문·제문·악장(樂章)의 제술, 제사의 진행 업무를 분담해 관장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