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齋生)들의 학습장소 또는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親臨)하여 과거를 시행할 때 시험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규모는 명륜당(明倫堂)과 같이 남향으로, 중앙에 정청(正廳)이 있고,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는데 모두 25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비천당기(丕闡堂記)」에 의하면 1661년(현종 2) 도성 안에 있던 인수원(仁壽院)·자수원(慈壽院) 등 두 사찰을 훼철하고, 우참찬 송준길(宋浚吉)의 제안으로 그 재목을 북학(北學)의 진흥사업에 사용하려 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다가 그뒤 대사성(大司成) 민정중(閔鼎重)이 진언하여 1664년 그 재목과 기와로 비천당을 건립하였다고 하였다.
비천당이라는 이름은 주자(朱子)가 성인(聖人)을 찬(贊)한 글 중 ‘비천대유(丕闡大猷)’라는 글귀에서 인용된 것이다. 또 양옆의 재실(齋室)을 일량재(一兩齋)·벽입재(闢入齋)라 명명하였는데 이는 모두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벽입재는 1784년(정조 8) 화재로 소실되어 그 해 9월에 다시 중건되었으나 한말 일량재와 함께 파괴되었으며, 비천당만 수백년간 원형을 유지하여오다가 이것도 6·25사변으로 소실되었다.
1946년 9월 이후 한때 정청인 비천당은 성균관대학교에서 대학본부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좌우 협실은 대학도서관으로 사용하였다. 1988년 8월 건평 184.4㎡의 규모로 다시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