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불신앙은 동서남북 사방의 부처를 신앙 대상으로 삼는 불교 신앙이다. 『삼국유사』의 사불산(四佛山)에 관한 언급이 사방불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사방불은 주로 신라에서 성행하여 신라의 유물, 유적에 상당수가 남아 있다. 현존하는 신라 사방불은 동방에 약사여래, 남방에 미륵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방에 석가모니불을 모신다. 중앙에는 보이지 않는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배치하여 하나의 불국토를 표현한 것이 신라의 사방불이다. 이러한 유형은 경전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신라인만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구성 방식이다.
문헌에 나타난 사방불에 관한 최고의 언급은 『삼국유사』의 사불산(四佛山)에 관한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죽령(竹嶺) 동쪽 약 100리쯤 되는 곳에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587년(진평왕 9) 별안간 사면이 방장(方丈)만 하고 사방에 여래가 새겨진 대석(大石)이 하늘로부터 산꼭대기에 떨어졌다.
이 사방불은 홍사(紅紗)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예배드리고, 절을 그 바위 곁에 세운 뒤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하였다. 문경의 사불산에 이 기록대로 사방불이 실재하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밖에 신라의 유물 · 유적 가운데 사방불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사방불이 표현된 석탑 또는 석조물로는 경주 남산 칠불암(七佛庵) 사면석불(四面石佛), 경주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방불, 경주경찰서 앞뜰 석탑 2기의 사방불, 경주 동천동 석탑사방불, 국립경주박물관 석탑 5기에 새겨진 사방불, 안강(安康) 금곡사지(金谷寺址) 사방불, 경주 호원사지(虎願寺址) 사방불 등이 있다.
이 석조 유형물들의 정확한 성립연대는 알지 못하지만 굴불사지의 사면석불만은 『삼국유사』에 언급이 있어서 대강 그 성립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경덕왕이 백률사(栢栗寺)에 행차하기 위해 산 아래 이르렀을 때 땅 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려 땅을 파게 하였더니 사면에 사방불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이에 절을 창건하고 굴불사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한다면 굴불사지의 사방불은 742년(경덕왕 1)에서 764년 사이에 발견된 것을 알 수 있다.
사방불의 사면에 어떤 부처를 모시는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많다. 경전(經典)을 근거로 하면 대략 여덟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① 『금광명경(金光明經)』 및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 의하면, 동방 아촉불(阿閦佛), 남방 보상불(寶相佛), 서방 무량수불(無量壽佛), 북방 천고음불(天鼓音佛)을 모시게 되고, ② 『대보적경(大寶積經)』에 의하면 동방 집길상왕불(集吉祥王佛), 남방 사자용맹분신불(師子勇猛奮迅佛), 서방 마니적왕불(磨尼積王佛), 북방 바라기왕불(婆羅起王佛)을 봉안한다.
③ 『대승대방광불관경(大乘大方廣佛冠經)』에 의하면 동방 정수최상길상여래(定手最上吉祥如來), 남방 무변보적여래(無邊寶蹟如來), 서방 대광명조여래(大光明照如來), 북방 보개화보요길상여래(寶開花普曜吉祥如來)를, ④ 『지구다라니경(智炬陀羅尼經)』에 의하면 동방 지구여래(智炬如來), 남방 금광취여래(金光聚如來), 서방 실오여래(室悟如來), 북방 뇌음왕여래(雷音王如來)를 봉안한다.
⑤ 『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에 근거하면 동방 약사유리광불(藥師琉璃光佛), 남방 정방불(定方佛), 서방 무량수불(無量壽佛), 북방 칠보당불(七寶堂佛)을, ⑥ 『금강정유가중약출염송경(金剛頂琉伽中略出念誦經)』에 의하면 동방 아촉불, 남방 보생불(寶生佛), 서방 아미타불, 북방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을 봉안한다.
⑦ 『대일경(大日經)』 제1권에 의하면 동방 보당불(寶幢佛), 남방 대근용불(大勤勇佛), 서방 무량수불, 북방 부동불(不動佛)을, ⑧ 『대일경』 제5권에 의하면 동방 보당불, 남방 개부화왕불(開敷華王佛), 서방 무량수불, 북방 고음불(鼓音佛)을 봉안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상에 있어서 반드시 이 유형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던 사례는 허다하다. 일본의 대통 17년명(大統十七年銘) 사면불상(551)에 의하면, 정면에 석가모니불, 배면에 정광(定光), 왼쪽에 미륵, 오른쪽에 보현(普賢)으로 되어 있어, 사방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석가삼존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신라의 경우 『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에 의하면, 태자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이 속세를 버리고 암자를 지어 오대산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5만의 진신을 보았고, 동서남북의 사방에 각각 관음(觀音) · 미타 · 지장(地藏) · 석가를 모셨다고 전한다. 이러한 유형은 신라인들의 독창적인 것으로서, 그들은 신앙대상으로서 이 4불을 도저히 제외할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또한 시대가 경과됨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신앙, 특히 약사여래신앙(藥師如來信仰)이 성행되면서 약사여래의 주처(住處)로 믿어지는 동방에 약사여래를 모시게 된 것도 역시 그들이 경전의 유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신라인의 신앙에 따른 독특한 면을 개발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현존하는 신라의 사방불들은 모두 이러한 유형에 따라 재구성된 것으로 동방에 약사여래, 남방에 미륵불, 서쪽에 아미타불, 북방에 석가모니불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보이지 않는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상징적으로 내포한 하나의 불국토(佛國土)를 표현한 것이 신라의 사방불이다.
또, 불굴사지의 경우 서방에는 미타삼존(彌陀三尊)인 미타 · 관음 · 대세지(大勢至)를 조성하였고, 동방에는 약사여래, 그리고 북방에는 여래상이, 남방에는 2구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동방과 서방의 경우는 그들의 지물(持物)로 보아 확실히 미타삼존과 약사여래임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남방과 북방의 경우에는 심한 마멸로 인해 거의 모습을 분간할 수 없어 남북의 조각상을 미륵과 석가로 단언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