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부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오우치(大內)에게 준 동제(銅製)의 통신부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국왕에게 주어 신표를 삼게 한 상아제(象牙製)의 통신부가 있다.
이 상아부를 만들어 주게 된 것은 1474년(성종 5) 일본국왕의 사신이 와서 일본국왕사와 제거추(諸巨酋)의 사신을 사칭하는 자가 많으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통신부를 만들어 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 요청에 따라 조정에서는 상아부 10개를 만들고 각 상아부를 둘로 나누어 우반부(右半部)를 일본에 보내어 사신을 보낼 때 휴대하게 하여 좌반부와 맞추어 보게 하였다. 상아부는 둘레가 4촌(寸)5푼(分), 원경(圓徑)이 1촌5푼의 원형의 크기였다.
그리고 양면에 ‘朝鮮通信(조선통신) 成化十年甲午(성화10년갑오)’라 전각(篆刻)하고, 좌에서 우로 제1부터 제10까지의 번호가 쓰여져 있었다. 국왕사에 한해서는 꼭 상아부가 있어야만 국왕사로서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상아부는 경조사(慶弔使)·통신사·보빙사 등 여러 종류의 국왕사들이 사용하였다. 상아부의 제조 사용은 조선정부의 다원적인 대일무역을 가능한 한 일원화하고 국왕사의 사칭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측에서 보면 흥리왜인(興利倭人)이 사송왜인(使送倭人)이 되어 유리한 접대를 받는다는 보증이었다. 특히 대마도(對馬島)의 소오씨(宗氏)에게는 서일본의 여러 세력을 물리치고 조선 무역을 독점적으로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