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대한인거류민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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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근대사
단체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조직된 한인의 자치기관.
이칭
이칭
상해대한인거류민단, 상해거류민단, 대한교민단
단체
설립 시기
1920년
해체 시기
1932년
설립자
여운형 외
설립지
중국 상하이
상위 단체
대한민국임시정부
전신
상해대한인민단
후신
상해대한교민단
내용 요약

상해대한인거류민단은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조직된 한인의 자치기관이다. 1918년에 결성된 상해고려교민친목회(上海高麗僑民親睦會)가 임시정부의 산하 조직으로 편제되면서 상해대한인민단(上海大韓人民團)으로 개칭하였으며, 1920년 1월 다시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임시정부의 외곽 단체로 상하이 교민의 생활을 보호하고 임시정부의 기반 조직으로서 기능을 수행하였다. 의경대(義警隊)를 조직하여 운영하였고, 인성학교(仁成學校)를 맡아 운영하여 독립운동가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정의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조직된 한인의 자치기관.
변천 및 현황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1910년대 초부터 한인들이 망명해 오면서 중국 상하이에는 소규모의 한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18년 국제 정세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독립의 기회를 엿보던 동제사(同濟社) 소속 청년들을 중심으로 그해 가을 상해고려교민친목회가 결성되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고려교민친목회는 임시정부의 산하 조직으로 편제되었다. 그해 9월 22일 총회에서 상해대한인민단으로 개칭하였으며, 1920년 1월 9일에는 다시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단장에 여운형(呂運亨), 총무에 선우혁(鮮于爀), 간사에 김보연(金甫淵), 임재호(任在鎬) 등이 선출되었다.

1920년 3월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원령으로 '거류민단제'를 공포함에 따라 임시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추인되었으며, 4월 20일부터 효력이 발생되면서 임시정부 내무부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

그해 10월 7일 임시정부가 외지 거류민의 자치를 제도화하기 위해 내무부령으로 「교민단제(僑民團制)」를 발표함에 따라 상해대한교민단(上海大韓僑民團)으로 개편되었다. 1921년 1월 교민단장에 주1, 총무 김보연, 간사 강경선(康景善)이 새로 보임되었으며, 사무실도 상하이 프랑스서 주2 하비로(霞飛路) 강녕리(康寧里)에 마련되었다.

조직과 주요 활동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외곽 단체로 19명의 상의원(常議員)과 집행기관으로 서무, 회계, 교육, 구제 등의 4개 과를 두었으며, 간사가 각 과의 업무를 분담하여 처리하였다. 상하이 동포 사회를 6개 주3로 나누고, 구장(區長)을 두어 통신과 납세 등의 사무를 분장하게 하였다.

1920년 당시 상하이 거류민 수는 18세 이상의 남자가 367명, 여자가 91명, 18세 이하의 남자가 47명, 여자가 33명으로 총계는 538명이었다. 1920년 10월 상해대한인거류민단 의원은 모두 17명이었다. 한진교(韓鎭敎), 서병호(徐丙浩), 이유필(李裕弼), 선우혁, 김인전(金仁全), 장붕, 김태연(金泰淵), 김순애(金淳愛), 안병찬(安秉瓚), 윤기섭(尹琦燮), 김구(金九), 김홍서(金弘敍), 여운홍(呂運弘), 이광수(李光洙), 도인권(都寅權), 최창식(崔昌植), 주4 등으로 대부분 임시정부 요인들이었다.

거류민단의 기본 업무는 교민의 생활을 보호하고 임시정부의 기반 조직으로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교민의 교육, 위생, 소방, 교통, 군병 모집, 빈민 구제, 민적(民籍) 사무, 교민 보호와 치안 확보, 밀정 제거 등의 사무를 담당하였다.

자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의경대를 조직하여 운영하였고, 1916년 설립된 인성학교를 맡아 운영하여 독립운동가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특히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자체에서 의연금 및 인구세를 직접 모금하여 이를 임시정부에 납부하였다.

기본 업무 외에 신년 축하식, 3 · 1독립선언식, 어천절(御天節) 기념식, 건국 기념식, 주5 기념식 등 각종 기념식과 환영회, 추도회 등을 개최하였다. 또한, 임시정부 및 교민 사회에 주요 사건이 발생하였을 경우 교민대회와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1923년 10월 1일 개최된 교민대회에서는 일본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당시 일제가 우리 동포를 학살한 데 대한 경고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2년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고 독립운동가들 역시 상하이를 떠나거나 지하로 숨어들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대신 일본 총영사관에서 조직한 친일 단체인 상해거류조선인회(上海居留朝鮮人會)가 설립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광재, 『근현대 상해 한인사 연구』(경인문화사, 2018)
『한국독립운동사』 4(국사편찬위원회, 1974)
『한국독립운동사』 3(국사편찬위원회, 1973)
『독립운동사』 4(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한국독립운동사』 2(국사편찬위원회, 1971)
『한국독립운동사』 1(국사편찬위원회, 1970)

논문

최경민, 「상해대한교민단의 결성과 활동」(『교육논총』 16,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1996)
김희곤, 「상해 대한인민단의 성립과 독립운동」(『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탐구당, 1992)
주석
주1

이명은 장창남(張滄南). 1919년 6월 상하이에 도착한 장붕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7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 조사 편찬부 위원으로 위촉되어 『한일관계 사료집』을 발간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 이사(理事) 및 목사로서 목회 활동을 수행하였고, 동지회(同志會)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 초반 동지회에 탈당서를 제출하고 이승만과 결별하였다.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주2

조계(租界)로 정하여진 곳.    우리말샘

주3

남일구(南一區), 남이구(南二區), 남삼구(南三區), 동구(東區), 서구(西區), 북구(北區)

주4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를 조직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상해대한인거류민단이 조직되자 최창식(崔昌植)과 같이 서구(西區) 의원에 뽑혀 교민 복지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임시정부 요인인 최창식과 결혼하여 임시정부의 뒷바라지를 계속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주5

나라의 수치.    우리말샘

집필자
윤상원(전북대학교 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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