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달성(達城). 자(字)는 혼원(混原), 호는 좌소산인(左蘇山人). 서호수(徐浩修)의 장남이다. 서철수(徐澈修)에게 양자 간 서유구(徐有榘)와 친형제간이며, 『규합총서(閨閤叢書)』의 저자로 잘 알려진 빙허각이씨(憑虛閣李氏)의 남편이다.
동생인 서유구의 「백씨좌소산인묘지명(伯氏左蘇山人墓誌銘)」에 따르면 서유본은 1762년(영조 38) 2월 6일에 태어나고, 1822년(순조 22) 7월 14일에 급병을 얻어 죽었다고 한다. 서유본은 약관에 거업(擧業 : 예전에 과거에 응시하던 일)을 닦아 관각체(館閣體 : 조선 시대에, 홍문관·예문관·규장각에서 사용하던 문체)에 뛰어났다. 22세 되던 해인 1783년(정조 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서 변려문(騈儷文)을 더욱 연마하였다.
1798년(정조 22)에는 성균관시에서 지은 주문(奏文 : 임금에게 아뢰는 글)이 정조의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과에 누차 낙방하고 1805년(순조 5) 가을에 음보(蔭補 :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1806년(순조 6)에 중부(仲父)인 서영수(徐瀅修)가 해도(海島)로 귀양 갈 때에 연루되어 관직을 빼앗겼다. 이후 학문에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1810년(순조 10)에 여름부터 주희의 『의례경전통해집전집주(儀禮經傳通解集傳集註)』를 공부하여 그것의 요점만 뽑아 『주례(周禮)』와 『예기(禮記)』를 부기한 『삼례소지(三禮小識)』 6권을 1819년(순조 19)에 편찬하였고, 1820년(순조 20)에 다시 『주자가례』를 연구하였다. 주희 설의 초만(初晩)의 이동(異同)을 참고하여 『가례소지(家禮小識)』 2권을 편함으로써 주자의 정론(定論)을 확정하고자 하였다. 그는 역사서를 읽으려면 역대 관제(官制)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관제연혁고(官制沿革考)』 2권을 저술하였다. 이것은 실증적 분석적 학풍에서 비롯된 듯하다.
서유본은 초기에는 일명(一名)을 얻고자 변려문 제작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의고문(擬古文) 제작에 힘을 쏟아 연암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팔가(八家)를 모범으로 삼아 명의 의고문이나 청의 변쇠한 문자들을 모두 배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오늘날의 학자는 팔가(八家)를 종(宗)으로 삼고 송유(宋儒)의 질박하고 실제적인 내용은 겉으로 바로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명인(明人)의 거짓 고풍에는 속없이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고 중부 서영수의 말을 인용하여 강조하였다.
1806년(순조 6)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학문에 주력하였는데, 당시 삼호(三湖 : 전라도 영암을 말하는 듯함)의 행정(杏亭)에 교거(僑居 : 남의 집에 임시로 삶)하면서, 궁경(窮經 : 경학을 깊이 연구함)과 저서(著書)에 정신을 쏟았다고 한다.
또 탄소(彈素) 유금(柳琴, 당호 幾何室)을 숙사(塾師 : 글방의 스승)로 모셔 『사기』를 구수(口授)받았다. 서영수의 필유당(必有堂)에서 서로수(徐潞修), 서유구와 함께 5일마다 고문 한 편씩을 짓는 문장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정조가 경술문예(경서에 관한 학문과 문예)를 고무시키자 선비들의 급고(汲古 : 고서를 조사하는 일)의 풍조가 퍼졌다. 서유본도 이 시기에 고문에 공력을 들였다. 그는 “일에는 반드시 실제가 있기 마련이고 실사(實事)의 가운데서도 반드시 옳은 것을 찾아 행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경학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였다.
서유본의 실사구시적 경학은 주희(朱熹)의 학설을 논박하거나 실용적인 경세치용학에 접근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주희의 학설을 변난부석(辨難剖析 : 옳고 그름을 변론하고 분석함)하여 그 본뜻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주희는 경전의 훈석(訓釋)에서 주소(注疏)와 선진(先秦) 문헌을 참조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이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도 배송(글월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공손히 외움)하지 못하면서 함부로 주희를 기평(譏評 : 헐뜯어 평함)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고증지학(考證之學)을 추구하는 학자들에 대하여도 주소(注疏)를 배송하지 못하면서 고증을 운운한다고 비난하였다.
서유본은 우거(寓居 :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삶) 이후에 부친의 유업을 이어 기하학과 역학(曆學)·상수학(象數學)·율려학(律呂學)을 5년 동안 연구하였다. 이 후에 그는 『주자가례(朱子家禮)』의 근원이 삼례(三禮)에 있다고 보고서 삼례와 가례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고증지학과는 달리 주희를 따라 삼례 가운데에 『의례(儀禮)』를 가장 중시하였다.
『좌소산인문집』에 실린 서유본의 문장은 의론문(議論文)이 대부분이라서 그의 문장의 전반적 특징을 알기는 어렵다. 그 가운데에 「진주순난제신전(晋州殉難諸臣傳)」은 일사장(逸事狀)이나 열전(列傳)의 문체를 따른 것으로서 득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는 근체시보다도 가행(歌行)과 고시(古詩)를 주로 지었다. 또 주희의 시를 본떠 지은 「재거감흥(齋居感興)」 42수는 연작(連作)의 영회시(詠懷詩)로서 작가의 내면세계가 잘 드러난다. 저서로는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이 있다. 여기서 ‘좌소(左蘇)’는 경기도 장단(長湍)의 옛 이름으로, 서씨 일족의 장원이 있었던 곳을 가리킨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증좌소산인(贈左蘇山人)」이란 시를 남긴 바 있는데, 이는 시를 지을 때 의고(擬古 : 옛것을 본뜸)와 창신(創新 : 새로운 것을 만듬)의 문제를 두고 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