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을 쓴 진하 축원 (震河竺源, 1861~1926)은 강원도 고성의 서(徐)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축원은 12살 때 금강산 신계사(神溪寺)로 출가하였으며, 대응 탄종(大應坦鐘)의 법을 이었다. 그는 참선과 간경에 전념하였고, 1886년 개강하여 17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쳤다. 1892년 충청북도 보은 법주사(法住寺)의 부교정(副敎正)이 되었으며, 이후 주지까지 역임하였다. 1912년에는 중국 절강성 영파(寧波)의 천동사(天童寺)에서 기선 경안(寄禪敬案)의 방명계회(放冥戒會)에 참가하였다. 법주사에서 교학을 강의하다가 1926년 제주도에 간 지 3일 만에 포교당인 아라교당(我羅敎堂)에서 법랍 54세로 입적하였다.
축원의 제자로는 근대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승려인 박한영(朴漢永, 18701948), 한용운(韓龍雲, 18791944) 등 다수가 있다.
『선문재정록』의 내용은 백파 긍선(1767~1852)이 『선문수경(禪文手鏡)』에서 선(禪)을 조사선(祖師禪) · 여래선(如來禪) · 의리선(義理禪)으로 구분하고, 이를 임제삼구(臨濟三句) 등에 배대한 것에 반박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긍선은 조사선과 여래선을 격외선(格外禪)에 두고, 의리선은 문자의 습기를 벗어나지 못한 단계로 보아 격외선의 아래에 두었다. 그러나 축원은 긍선이 조사선과 여래선을 격외선으로 통칭하고 의리선을 그 아래에 두면서 교승(敎乘)이라 설명한 것은 원돈교(圓頓敎)를 선에 배정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라 보았다. 이어 축원은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은 모두 교(敎)가 아닌 ‘교외(敎外)’이며, 의리선이 격(格)이고 다른 두 선은 ‘격외(格外)’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또 의리선을 별도의 선으로 세웠다면 격외선도 별도의 선으로 세워 모두 4종의 선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축원은 백파 긍선의 문손인 설두 봉기(雪竇奉琪, 1824~1889)가 쓴 『선원소류(禪源溯流)』에 대하여서도 다음과 같은 비판을 제기하였다. '화엄(華嚴)의 이사무애(理事無礙)와 사사무애(事事無碍)를 각각 여래선과 조사선에 배당한다면 화엄은 양자를 모두 갖추는 교외의 법이 되는데, 어째서 삼처전심(三處傳心)만을 선의 별전(別傳)의 기준으로 삼는지 의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한편 축원은 초의 의순(17861866)이 쓴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와 우담 우행(優曇禹行, 18221881)이 쓴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에 대해서도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선 논쟁이 불필요한 시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저서들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축원은 분류된 선들이 이름만 다를 뿐 그 본질은 모두 같다고 주장하며 일심(一心)을 선의 근원으로 내세웠다. 이처럼 축원은 『선문재정록』을 통해 선 논쟁에서 드러난 모순과 선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축원이 앞서의 논점들을 종합한 뒤 그 위에서 새로운 차원의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선 논쟁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후학들에게 선과 교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책을 집필하였던 것이다.
19세기 불교계에서는 선을 분류하고 각 선의 우열을 가리고 특징을 논하는 '선 논쟁'이 펼쳐졌다. 먼저 백파 긍선은 선을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의 3종으로 차등화하여 구분했고, 그에 대해 초의 의순은 사람이 가진 능력의 차이를 두고 선을 나누고 수직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우담 우행은 의순이 주장한 조사선=격외선, 여래선=의리선의 구도를 지지했고, 설두 봉기는 조사인 긍선의 선종 분류를 옹호하였다. 이에 대해 진하 축원은 『선문재정록』을 통해 선 논쟁에서 논란이 되었던 선 분류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고, 분류된 선들의 본질은 모두 같다고 주장하였다. 축원의 『선문재정록』에 이르러 19세기 불교계의 선 논쟁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사실 선 논쟁은 선과 교가 함께 어우러져 형성되어 온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선과 교 양자를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하는 선과 교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