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암 추붕(雪巖秋鵬, 1651∼1706)은 평안도 강동(현 평안남도 강동군) 출신으로 강원도 원주 법흥사(法興寺)에서 출가했다.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서 편양파 월저 도안(1638∼1715)의 아래에서 10여 년을 공부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 도안은 한글로 『화엄경』의 음석(音釋)을 붙였던 당대 화엄학의 대가였고 대둔사(大芚寺) 12대 종사(宗嗣) 가운데 제3대 종사였다. 도안의 제자였던 추붕 또한 선과 교에 정통하고 시문에도 능했으며, 대둔사에서 화엄 강회(講會)를 열어 대둔사의 12대 강사 중 제5대 강사가 되었다. 보현사에서 입적했다. 그가 쓴 책으로는 『설암잡저』, 『설암선사난고』, 『선원제전집도서과평』, 『법집별행록절요사기』 등이 있다.
『선원제전집도서과평(禪源諸詮集都序科評)』은 2권 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평안도 영변 묘향산 보현사에서 1740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1737년(영조 12) 청월 국선(淸月國禪)이 쓴 서문(序文)에는 추붕의 제자 성곡당(城谷堂) 민기(敏機)가 판에 새겨서 간행했다고 한다.
『선원제전집도서과평』은 설암 추붕이 당나라 승려 종밀이 쓴 『선원제전집도서』를 분과(分科)하고 과문(科文)을 붙여 평한 주석서이다.
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는 선종의 전적 100권에 대한 총설을 쓴 책이다. 종밀은 선을 분류하고 선과 교를 대비시켰으며 본각진심(本覺眞心), 일심진여(一心眞如) 등을 근거로 선과 교의 일치를 주장했다. 이러한 종밀의 사상은 고려 후기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은 물론 조선시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선원제전집도서』는 조선 후기 강원 이력 과정의 사집과(四集科) 교재로 채택되어 널리 읽혔다.
『선원제전집도서』의 도식(圖式)에 대한 의문점을 문답 형식으로 풀어쓴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의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가 나온 이래, 『도서』 전체에 대해 과목(科目)을 달고 과문(科文)을 쓴 주석서들이 나왔다. 본서 외에도 상봉 정원(霜峰淨源, 1621∼1709)의 『선원제전집도서과문(禪源諸詮集都序科文)』,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의 『선원집도서착병(禪源集都序著柄)』,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의 『도서과목병입사기(都序科目幷入私記)』 등이 전한다.
추붕은 『선원제전집도서과평』에서 과문을 붙이고 ‘평왈(評曰)’이라고 하여 『선원제전집도서』에 대한 해설 및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종밀의 선교일치론에 입각해 돈점(頓漸)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중시하고 돈오(頓悟)와 점수(漸修)가 모두 일심일대사(一心一大事)임을 강조한다.
연담 유일은 “『도서』와 『절요』의 사기(私記)가 없었다가 근래 상봉 정원이 과문을 썼지만 너무 간략하고, 설암 추붕과 회암 정혜가 지은 사기가 참고할 만하다. 그 중 정혜의 것이 가장 충실하여 규범이 되고 있지만, 다만 『도서』와 『절요』에서 돈오점수 사상이 가장 근간이 됨에도 그는 이지(理智)로 판석하여 본의를 잃고 있다. 여기서는 사지(事智)의 현전(現前)으로 분별하여 밝히고자 한다."라고 『선원제전집도서과평』을 평가했다. 유일은 추붕과 정혜의 『선원제전집도서』 주석서를 인정한 후, 정혜의 사기가 더 낫지만 돈오점수의 특성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추붕의 『선원제전집도서과평』은 돈오점수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선원제전집도서』에 대한 상세한 해석을 하고 있어 이후 주석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과 교를 함께 계승해야 했던 조선 후기 불교계의 상황에서 강원 이력 과정의 『도서』와 『절요』는 강원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차원에서 『선원제전집도서과평』은 『선원제전집도서』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달고 있어 『선원제전집도서』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힌 책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