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4.63m. 석탑은 조선 숙종 때 없어졌다고 하는 천주사(天柱寺) 또는 죽암사(竹巖寺) 등에 있었다고 전하지만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층의 낮은 받침돌 위에 탑신부(塔身部)와 상륜부(相輪部)를 올린 석탑으로, 받침 부분의 구성과 몸돌의 조형이 특이하다. 받침돌은 바닥돌 위에 4장의 크고 긴 돌을 놓은 간단한 구조로 이루어졌다. 각 면에는 2좌(座)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었고, 그 위에 덮개돌을 표현한 얕은 턱이 둘러져 있으며, 다시 그 위에 다른 돌로 만든 2단의 굄이 있다.
1층의 몸돌은 4장의 돌로 구성되었지만,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었고, 지붕돌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이 있다. 각 층의 지붕돌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약간씩 들려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데, 귀퉁이에는 풍경을 단 구멍이 뚫려 있고, 구멍 둘레에는 연꽃무늬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과 함께 철제 찰주(擦柱)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석탑은 높이가 높아서 안정감이 부족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세부의 결구(結構)는 짜임새가 있는 규율성을 잃지 않았고, 여러 부분에는 특이한 수법이 남아 있어, 대체로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에 상륜부에서 60㎜×40㎝ 크기의 백지(白紙)에 먹으로 쓴 당탑조성기(堂塔造成記)가 발견되었는데, 조성기에는 ‘건통 9년 3월 9일기(乾統九年三月九日記)’라는 연대가 적혀 있다. 건통 9년은 1109년(예종 4)인데, 이를 기준으로 여러 불사를 일으킨 내용이 담겨 있다. 곧 기문(記文)에는 건통 9년에서 206년 전인 904년(효공왕 8)에 황룡사 사문(沙門) 혜조가 석탑이 건립된 절의 주지로 있었고, 이 절에 의지한 중대사(重大師) 학선이 7년 전인 1102년(숙종 7) 임오년에 입사·화향(花香)하였으며, 1107년 정해년에 발심하여 금당 1칸과 불좌(佛座)를 만들고서 석탑 5기를 새로 건립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때 사용한 물품의 이름과 불사 시행연유자의 이름도 열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