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3년(공민왕 22) 6월 응거시(應擧試)로 급제하고, 그 해 9월 정조사(正朝使)인 밀직부사(密直副使) 주영찬(周英贊)을 따라 명나라에 과거를 보러 가다가 풍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다시 밀직부사 장자온(張子溫)을 따라 명나라에 들어가 회시(會試)를 보려고 하였으나 도착이 늦어 시험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상호군(上護軍)·나주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 (공양왕 1) 상호군 겸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제수되었으나 나주목사 재임시 청렴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고신(告身: 사령서)에 서명을 받지 못하였다.
그 뒤 대사성(大司成)을 지냈으며, 1391년에는 일본의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 九州探題) 미나모토[源了浚: 今川了浚]가 포로가 된 남녀 68인을 보내준 데 대한 답례로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서 보빙사(報聘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1393년(태조 2)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로서 전에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그를 보좌한 공으로 대장군(大將軍) 조경(趙卿)과 함께 상을 받았다. 1396년 풍해도관찰사(豊海道觀察使)로서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는 등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