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불상이 자리한 산 주변 일대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각은 하나도 없다.
이 불상은 거대한 판상(板狀 : 널빤지처럼 생긴 모양)의 화강암에 고부조(高浮彫 : 모양이나 형상을 나타낸 살이 매우 두껍게 드러나게 한 돋을새김)한 것이다. 현재 광배는 파손이 너무 심해 남아 있는 부분이 거의 없으며, 불상도 훼손과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세 동강이 난 불상을 일제 강점기에 보수하여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 한다. 지금도 목과 무릎 아래에 접합한 흔적이 남아 있다.
불상의 양옆과 뒤쪽으로는 석재를 쌓아 올려 일종의 감실처럼 꾸며 놓았다. 그 둘레에는 철책을 설치해 놓았다. 불단이 마련된 지면(地面)도 큰 석재를 쌓아 올려 다듬었다. 이 석재들 사이에 불상의 무릎 이하가 매몰되어 있어, 현재 대좌의 유무는 확인할 수 없다.
머리는 나발(螺髮 :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이고 크고 뚜렷한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와 긴 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원만하고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다. 미간엔 백호(白毫 :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를 표시했는데 무엇인가를 삽입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장대한 어깨는 부드럽고 굴곡 있게 묘사했다. 가슴은 풍만하고 당당하다. 법의는 통견의(通肩衣 : 어깨에 걸쳐진 옷)이며, 몸에 밀착되게 표현되어서 신체의 양감이 잘 드러난다. 옷주름은 배 앞으로 층단을 이루며 내려왔고, 양다리로는 타원동심원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두 손은 마모가 심해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슴 앞에서 모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권인(智拳印 : 왼손 집게손가락을 뻗치어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쥔 손 모양)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지권인을 결한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비로자나불입상으로는 경주박물관 소장의 9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이는 영양 출토 석조비로자나불입상과가 있다. 또한 9세기 전반기의 작품으로 알려진 봉화군 동면리의 마애비로자나불입상 등을 들 수 있다. 송정동 석불입상은 앞의 두 불상보다는 양식적으로 후대의 작품이라 생각된다.
이 불상은 조각 수법이 풍만하면서도 사실적이고, 신체가 균형 잡혀 있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기법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군위 위성동 약사여래입상의 듬직하고 묵중한 신체 표현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